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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풍경– 김은진전

전시장소 갤러리 담 전시기간 2017년 8월26일 ~ 2017년 9월 5일 전시작가
관계의 풍경– 김은진의 근작들

2015년에 열린 개인전 <The Moment>에서 김은진은 “나무들”을 그렸다. 그렇지만 나는 당시 김은진의 작품을 간단히 ‘나무 그림’으로 지칭할 수 없는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일단 이 작품들에서는 비물질, 비대상이라 할 “빛”이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김은진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그것은 “달빛을 받아서, 하얀 눈빛을 받아서, 혹은 가로등 아래에서, 은은한 불빛에 빛나는”(2015, 작가노트) 모습들이다. <The Moment>의 주무대인 ‘밤’은 빛이 돋보이는 순간이다. 특히 눈 쌓인 겨울밤은 빛의 존재감이 가장 두드러진 시-공간에 해당한다. 게다가 2015년의 김은진은 방해말(方解末)을 써서 그 빛에 물질성, 실질성을 부여했다. 화가의 덧붙이는 행위로 인해 그림 표면에 방해말과 함께 엉겨 붙은 금박과 은박들의 “반짝반짝 빛나는” 현상을 언급할 수도 있다. <The Moment> 연작들(2015)에서 나무의 거친 질감들, 그 숲의 검붉은 색채와 음영들은 확실히 빛의 지각적 체험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빛 체험은 몸의 감각과 얽혀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들을 “빛의 효과로 창출된 순간적이고 신체적인 공간에 대한 탐색”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게다. 
2015년 전시에서 천명된 ‘빛’과 ‘지각’의 문제를 김은진의 최근 작업에 접근하는 단서로 삼을 수 있다. 가령 <shadow>(2017), <뒤집힌 시간>(2017)과 같은 근래의 작업들에서 김은진은 벽에 비친 나무(가지들)의 그림자를 그렸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 그림자는 빛의 산물이고 따라서 빛과 마찬가지로 비물질적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화가가 그림자의 비물질적인 네거티브(negative) 형상에 물질적이라 할 만한 포지티브(positive) 요소들을 부여했다는 점이다. 즉 나무 그림자는 -다시금 화가의 덧붙이는 행위를 통해- 포지티브의 요소들, 즉 윤곽, 색채,  질감, 음영, 두께 같은 것들을 지니게 됐다. 그렇게 되면 본래 거꾸로 된, 즉 원본에 대해 뒤집혀 있는 나무그림자는 사실상 그 원본인 나무처럼 보일 수 있다. 따라서 이 작품들은 감상자를 난처하게 할 텐데 왜냐하면 그가 그것을 나무처럼 보려고 할 때는 그림자 같은 성질들이, 그림자처럼 보려고 할 때는 나무 같은 성질들이 자꾸 눈에 들어올 것이기 때문이다. 몸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도 문제다. 즉 그것이 뒤집혀 있기에 감상자는 위와 아래, 왼쪽과 오른쪽을 결정하는 데 애를 먹을 수밖에 없다. 그런가하면 깊이 지각(depth perception)도 문제가 될 것인데 왜냐하면 그가 그것을 나무처럼 볼 때는 나무 안쪽 탁 트인 공간을 감지할 수 있을 테지만, 벽에 비친 그림자로 볼 때는 그 안쪽에 마땅히 아무 것도 없을 것-막혀있는 벽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깊이’의 문제를 좀 더 다뤄보기로 하자. 주지하다시피 눈의 망막에 맺힌 상은 그 자체로 깊이를 갖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렸다는 클로드 모네의 그림이 평평하게 보이는 이유다. 물론 가까이 있는 것은 크게, 멀리 있는 것은 작게 보이지만 우리 눈(망막)에는 오로지 크고 작은 사물들의 상이 맺힐 뿐이지 거리(깊이) 자체가 맺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깊이는 대상 자체가 아니라 보는 주체의 관점에 속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깊이는 정면에 있지 않고 측면에 있다. 그렇다면 정면에서 깊이를 운운하는 일은 메를로-퐁티가 말한 대로 “측면에서 파악된 넓이la largeur consid&eacute;r&eacute;e de profil”를 암암리에 전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정면에서 보면서도 “측면에서 파악된 넓이”를 끌어들여 깊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주체의 지각이다. 그래서 메를로-퐁티는 “깊이는 나와 사물의 관계이다”라고 한 것이다. 확실히 깊이는 다른 공간적 차원들에 비해서 훨씬 더 사물과 몸(지각)의 관계에 깊이 연루되어 있다. 다시 김은진의 최근 작업으로 돌아오면 문제의 <shadow>나 <뒤집힌 시간>에서 감상자는 종래의 풍경화나 산수화를 볼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깊이를 지각할 수 없다. 무엇보다 묘사된 형상들이 벽에 맺힌 그림자 이미지라는 것이 문제다. 따라서 감상자는 깊이를, 그 안쪽에 있을 것으로 가정된 시원한, 탁 트인 공간을 환하게 들여다볼 수 없다. 대신 그에게는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깊이, 곧 겹겹으로 쌓인 두툼한 안료의 층들이 주어져 있다. 그 물질적 공간의 깊이, 두께는 멀찍이 떨어져 그저 눈으로 관조하는 식으로는 지각하기 힘들다. 그 두께를 지각하려면 작품에 가까이 다가가 그 표면에 얽혀있는 것들을 눈으로 매만지며 “긁고, 뿌리고, 찍고, 붙이며 긁어 없애는” 작가 몸의 궤적을 추적할 필요가 있다. 즉 자신의 살아있는 몸을 수행해야(일으켜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들 역시 대단히 신체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방금 전에 <shadow>나 <뒤집힌 시간> 표면의 “얽혀있는” 것들을 말했는데 여기서 얽혀있는 것들은 재료들만이 아니다. 여기서는 주체/대상, 인간/공간도 서로 얽혀있다. 즉 여기서 주체는 대상, 곧 자기 앞에 있는 그림, 자기에게 주어진 공간을 익숙한 지각방식이나 몸틀(un sch&eacute;ma corporel)로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그것을 지각하고, 파악하려면 주체는 자기 몸을 그림-공간에 개입해야 한다. 즉 여기서 주체와 대상은 맞서있기 보다는 서로 얽혀있다. 즉 체험은 주체와 대상이 서로 얽히면서 발생한다. 그런 까닭에 ‘얽힘(intertwining)’을 김은진 근작들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 단서라 삼을 수 있다. 
이제 <엉키고 엉켜진>(2017), <뒤엉킴>(2017), <뒤엉킨 순간>(2017)들이 구현하는 얽힘의 양상을 확인해보자. 이 작품들에서는 이른바 ‘형상-배경의 법칙’(figure & ground law), 즉 배경(ground)로부터 형상(figure)을 끌어내는 식으로, 전경(前景)과 후경(後景)을 구별하고 주어진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지각방식이 원활하게 관철되지 않는다. 우리 눈이 그림의 어떤 부분을 형상으로 삼아 주목하려 하면 곧장 다른 부분이 앞으로 나오고, 그러면 또 다른 부분이 앞으로 나오는 식이다. 심지어 배경으로 간주할 수 있는 부분조차 두툼한 질감을 지니고 있기에 형상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는 느긋하고 편안하게 관조하며 여백의 미를 만끽하는 식의 감상이 사실상 가능하지 않다. 대신 감상자는 자신의 살아있는 몸을 수행하는 식으로, 즉 작품에 밀착하여 눈으로 그것을 더듬는 식으로 그 “엉키고 엉켜진” 것들, “뒤엉킨 순간”들을 만나야 한다.
이 작품들을 “신체적 풍경”이라 부르면 어떨까? 김은진의 작업들이 지각방식을 문제 삼고 공간에 몸이 개입하는 양상에 천착한다는 점에서 ‘신체적 풍경’은 썩 그럴듯한 명명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신체적 풍경’이라는 개념으로는 아직 충분치 않아 보인다. 이 작가에게 그 신체적 풍경은 어떤 인간적인, 아주 개인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림자의 움직임, 그 상(像)은 실체인가?, 가상인가? 상(像)은 있으나 스스로는 존재할 수 없는 실제인 듯하나 실제가 아닌, 대상인 듯 하나 실제 그 대상이 아닌, 그 대상의 본연의 색은 표현되지 않고 시간의 흐름, 날씨에 따라 바뀌는 빛, 바람, 빗줄기, 눈(雪) 등 외부의 요소로 순간 변화되어지는 모습들은 마치 내가 타인들을 만나면서 그 공간과 시간 속 그들과의 관계 안에서 그들에게 보여지는 의식적으로 만들어낸 내 표정, 행동, 나의 감정상태를 닮은 듯하였다.”(2017, 작업노트) 작업노트에 서술된 내용을 참조하면 이 작가에게 주체/대상, 인간/공간의 얽힘은 단순히 감각적 쾌, 지각의 즐거움을 지향하기보다는 오히려 삶의 실존을 문제삼는 다분히 윤리적인 지향을 내포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여기에는 주어진 조건에 자기 자신을 어떻게든 맞추고, 거주하는 공간에 자기 몸을 적응하면서 살아야 하는 인간적 조건에 대한 공감 내지 연민이 깃들어있다. 이렇게 본다면 김은진의 근작들을 현존재의 삶의 방식에 구조적으로 상동하는 회화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현시점에서 그것을 나는 다만 잠정적으로 “관계의 풍경”으로 명명하고자 한다.           
                              홍지석(Hong Ji-Suk, 단국대학교 연구교수,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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