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윤 개인전 ‘받은사랑 이후의 사랑’
전시장소 | 나마갤러리 1관,2관 | 전시기간 | 2024년 6월 5일 ~ 2024년 6월25일 | 전시작가 | 최지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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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윤 초대전
받은사랑 이후의 사랑 Love after being Love
나마갤러리 1관,2관 6월 5일(수) ~ 6월 25일(화)까지 (일.월휴관) 서울시 종로구 돈화문로 80-1 02.379.5687
최지윤 (崔 智 允) Choi, Jeeyun
경희대학교 미술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개인전31회 예술의전당,갤러리아트사이드,노화랑,인사아트센터,리각미술관,신세계갤러리,갤러리세인,나마갤러리外 국내외 아트페어 50회 KIAF,화랑미술제,아트부산,취리히아트페어,아트타이페이,싱가폴어포더블아트페어, 홍콩어포더블아트페어外 국내외 그룹전 및 기획초대전 500여회 주요작품소장처 국회의사당로비 작품설치(임차),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서울시립미술관, 외교통상부, 주브르나이대사관,주)크라운.해태, 주)윈스로드, 주) 태성씨앤티, 자생한방병원. 명지성모병원外 다수 E-mail/hanartchoi1@daum.net H.Page/www.artchoi.com Instagram/ grida_jeeyun
받은 사랑 이후의 사랑
김성호(Sung-Ho Kim, 미술평론가)
작가 최지윤은 최근 ‘사랑하놋다’라는 제명의 연작을 통해서 사랑을 화폭에 담는다. 필자는 그녀의 작업이 주제 의식으로 품은 사랑을 ‘받은 사랑 이후의 사랑’으로 해설한다. 그것이 무엇이고 어떠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가? 또한 한국화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승하고 실험하는 최지윤의 회화에서 주요하게 살펴볼 미학적 함의는 무엇인가? 작가가 〈사랑하놋다〉 연작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사랑의 메시지를 살펴보자.
I. 꽃들이 전하는 메시지 - 아가페로부터 최지윤의 작업에서 사랑이라는 주제 의식은 언제, 어디서 왔는가? 어느 젊은 날, 우연히 들꽃과 마주했던 감흥을 떠올리는 작가는 ‘그 시기부터 자기 작업이 천착했던 근본이 사랑을 향한 것’이라고 토로한다. 그녀는 들꽃을 대면하면서 갑작스럽게 왜 사랑을 성찰했을까? 자연 속 지천으로 널린 들꽃이 실제로 저마다 생물학적 학명이 있고 꽃 이름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자주 자연과 한 덩어리의 존재로 간주하면서 ‘이름 모를 꽃들’로 대리 호명하곤 한다. 단수보다는 복수로 호명되기에 적합해 보이는 들꽃(들)! 그것은 어찌 보면 신이 자연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준 존재이다. 최지윤이 들꽃이라는 야생화(野生花)에 집중했던 시기의 작업은 햇볕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능선 위에 군집한 꽃이나 비를 맞거나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꺾이지 않는 꽃들의 자생력을 강인한 형상으로 드러내기보다 대체로 자연의 생성소멸과 순환의 질서에 순응하는 유연하고도 여유로운 자태의 심미감 가득한 ‘소산적(所産的) 자연’으로서의 들꽃 형상이었다. 소산적 자연? 그것은 스콜라 철학이 말하듯, ‘신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로서의 자연’이다. 최지윤은 “사랑은 오롯이 신의 영역”이라고 작가 노트에서 고백한 바 있다. 기독교에서는 신의 존재 자체가 사랑이라고 했던가? 신의 절대적인 사랑, 즉 아가페(agapê)는 자발적이고 신실한 영원불변의 사랑이자 인간을 향한 주권적인 은혜이기도 하다. 이러한 신의 사랑은 내가 인간으로 태어나기 전에 ‘이미 주어진 것’이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의 경험 이전에 ‘먼저 이루어진 것’(a priori)이라는 점에서 선험(先驗)적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사랑은 어떠한가? 인간에게 사랑은 인식론의 차원보다 화용론의 영역에서 작동한다. 인간에게 사랑은 삶의 현실 속 경험 ‘뒤에 이루어진 것’(a posteriori)이라는 점에서 후험(後驗)적이다. 경험으로 비로소 보이는 사랑! 그러니 신의 사랑이 아무리 선험적이라고 할지라도 인간으로서는 그것을 경험 없이 인식할 수 없다. 한편, 최지윤의 작업에서 꽃들을 통해서 표현했던 사랑이라는 주제 의식은 현실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신에게 받은 사랑’으로부터 ‘부모에게 받은 사랑’으로 전이한다. 대학 시절 병환으로 인한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망 그리고 한참 뒤 맞닥뜨린 어머니의 죽음은 커다란 상실을 낳으면서 그녀가 사랑이라는 주제에 더욱더 골몰하고 천착하게 만들었다. 인간은 누구나 타자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해서만 죽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뿐이라지만, 부모의 죽음은 어떤 누구의 부재보다 커다란 상실과 결핍을 남긴다. ‘희생까지 아우르는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인 아가페는 비단 신의 사랑뿐만 아니라 부모의 사랑을 아우른다. 작가 최지윤이 전하고자 했던 사랑이란 ‘받은 사랑’이었다. 신에게서, 부모에게서 받은 아가페로서의 절대적인 사랑 말이다. 이제 최지윤은 ‘받은 사랑을 예술로 전하는 신탁(神託)’의 소명을 다하고자 한다. 최지윤은 꽃의 해석과 전통 채색화에 대한 재해석 그리고 인간을 은유하는 동물 형상과의 상응과 조화를 통해서 받은 사랑을 전할 뿐만 아니라 ‘받은 사랑 이후의 사랑’인 ‘사랑하기’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예술적 소명을 성취하고자 한다.
II. 보석이 품은 언약 – 사랑하놋다 최지윤의 최근 연작인 〈사랑하놋다〉의 작품명은, ‘사랑하다’는 동사에 ‘-는구나’의 의미를 담은 어미 ‘놋다’가 합쳐진 것으로, ‘사랑하는구나’라는 뜻을 지닌다. 이 말은 ‘누군가(혹은 무엇인가) 사랑하는 자기(혹은 타자)를 발견한 느낌’을 십분 담는다. 최지윤은 신탁자를 자처하면서 신으로부터 그리고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인 아가페를 전하는 것을 넘어서서 이제 ‘받은 사랑 이후의 사랑’을 전하고자 한다. 그것은 받기보다 주기에 집중된다. 이 사랑 주기는 사랑의 대상을 찾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을 찾는 일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리는 즐거움과 아는 즐거움이 없었다면 ‘나의 사랑’을 알 수 있었을까?”라고 최지윤이 반문하고 있듯이, 그녀는 그리는 일에서 자기 사랑을 찾고자 한다: “나는 자연을, 사랑을, 세상을, 마음을 그린다. 사물과 꽃으로 나만의 이야기를 만든다. 그 속에서 추억하고 위안을 얻으며, 소망하고, 사유한다.” 그림을 통해서 구현하려는 자기 사랑이란 무엇인가? 자기가 누군가(혹은 무엇인가) 사랑하는 것이자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달리 말해 받는 사랑을 넘어선 주는 사랑이다. 그래서 이 사랑은 아가페로부터 현실에 내려앉은 에로스(erōs)로 이동한다. 아가페가 비움과 희생의 절대적 사랑이라면, 에로스는 채움과 욕망(desire)의 자기 본위의 사랑과 연동한다. 플라톤에게서 에로스는 인간이 ‘이데아를 영원히 소유하려는 차원 높은 충동적 생명력’이자, 프로이트에게서 그것은 ‘자기 보존 본능과 결부된 성(性)적 에너지인 리비도(libido)이기도 하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의 사랑이, 자기의 사랑하기가 영원히 지속되길 원한다. 최지윤은 이러한 사랑(하기)의 지속이라는 화두를 작업 속에서 구현하려고 시도한다: “이별과 상실의 아픔 속에서 변하지 않는 영원한 무엇을 찾고자 했던 나는 자연이라는 환(幻)의 고리 속에서 최고의 아름다운 ‘꽃’과 ‘보석’으로 영원히 존재함을 사랑의 서사로 풀어내게 되었다.” 청혼이나 결혼식 예물로 사용되는 보석을 생각해 보라. 그것은 운명적 사랑에 대한 고백이자 제안이고, 앞으로도 그 사랑이 영원히 빛날 것이라는 주문(呪文)이거나 그 사랑을 지키겠다는 책임과 믿음에 대한 언약을 상징한다. 인간의 사랑에는 영원함을 지키기 위한 판단, 선택, 결단, 약속, 책임과 같은 일들이 더 주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흥미로운 것은, 보석이란 인공적 존재이지만, 원래 원석의 광물로 존재하다가 인간에게 발견되어 채굴, 가공된 것이라는 점에서 근원적 위상은 자연이라는 점이다. 그래서일까? 최지윤은 2012년부터 시작한 〈사랑하놋다〉 연작에서 ‘영원한 사랑’이자 ‘근원적 자연’을 상징하는 보석 이미지를 조류의 날개나 포유류의 피부 등 동물의 형상과 겹쳐 놓는다. ‘동물=보석=자연’의 위상을 작품에 두루 담은 셈이다. 나아가 이 ‘보석 동물’은, 많은 부분 십이지(十二支) 동물을 포함하고 있듯이, ‘동물=보석=자연=인간’의 의미를 담은 것이기도 하다. 피상적으로, 전통 화조도나 십장생도의 현대적 변주처럼 보이는 그녀의 작품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모두 반짝이는 보석을 품고서 저마다의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다. 조형적으로는 하얀 비둘기 한 쌍이 날갯짓하면서 날아오르고 있는 화면 중앙에 커다란 크기의 보석이 마치 프리즘 모양으로 표현된 것도 있지만, 대개는 날짐승의 날개와 들짐승의 털이나 피부를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크기, 모양, 색깔의 보석들이 복수의 집적체(multiple accumulation)처럼 사용된 것들이다. 예를 들어 공작의 화려한 깃털, 앵무새의 잔잔하고도 화사한 깃털, 몽글몽글한 강아지털, 양털 혹은 토끼나 원숭이의 매끈매끈한 잔털 피부 등을 표현한 모양, 크기, 색깔이 제각각인 다양한 보석들의 군집 형식이 그것이다. 게다가 작품 속 빛나는 보석 옷을 입은 한 마리 혹은 한 쌍의 동물은, 보석이 상징하는 사랑의 언약을 강조하려는 듯, 저마다 각기 다른 친밀한 사랑의 포즈를 선보인다. 꽃잎을 잎에 물고 있는 돼지, 꽃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양, 그리고 꽃나무 아래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앵무새 한 쌍과 서로 같은 방향을 함께 보고 있는 공작새 한 쌍이 그러한 예들이다. 이처럼 사랑의 언약으로 상징되는 보석을 입은 동물들의 형상은 또 다른 사랑의 상징인 꽃과 함께 관객에게 ‘사랑하놋다’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한다.
III. 채색화 전통의 변용과 융합의 조형 실험 작가 최지윤은 자연 속 암벽을 극사실주의 회화로 탐구했던 초기 작업 이래 채색화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변용하는 독자적인 조형 실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변모의 과정을 거쳐 왔다. 1992년 개인전에서 선보였던, ‘빛의 변화에 따른 일상의 풍경’을 담은 거칠고도 우울한 분위기의 수묵화 실험 시기, 아크릴, 오일파스텔, 스크래치 및 콜라주 기법 등 다양한 재료 탐구를 시도하던 시기, 그리고 이전의 실험들이 정제된 상태로 하나의 화면 안에 조화를 이루고 있는 캔버스 혼용의 시기 등 그녀는 매체적 한계가 비교적 뚜렷한 한국화의 장에서 매우 다양한 조형 실험을 거듭해 왔다. 지난 30여 년간 작업의 형식과 내용은 조금씩 변화를 거듭해 왔지만, 작업의 메인 주제는 언제나 사랑이라는 화제였고, 그 소재의 근간은 꽃이었다. 그렇다면 최지윤의 작업이 독자적인 면모를 띄게 된 형식은 무엇인가? 이 글은 그것을 ‘채색화 전통을 변용한 융합의 조형 실험’으로 해설한다. 그녀의 작업이 추구하는 변용과 융합은 통시적인 종적 시간과 공시적인 횡적 공간이 맞물리는 실험이었다. 즉 ‘한국화 전통의 현대적 계승과 변용’ 그리고 ‘한국화의 서구적 융합’이 병행된 조형 실험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자세히 살펴보자. 첫째, ‘한국화 전통의 현대적 계승과 변용’에 관한 것이다. 즉 현대 한국화가의 과업인 창작 태도와 관련한 것으로 우리에게 온고지신(溫故知新)과 법고창신(法古創新)을 되뇌게 한다. 온고지신은 공자가 『논어(論語)』 「위정(爲政)」편에서 거론한 것으로 “옛것을 익히고 새로운 것을 알면 스승이 될 수 있다(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는 말로부터 온 것이다. 이 말은 새것을 알기 전에 필히 과거 전통에 대한 앎을 전제하는 연구 태도와 관련된다. 반면에 법고창신은 방점이 창신에 찍혀 있다. “옛것을 본받아 새것을 창조함”이라는 의미의 이 고사성어는 옛것에 대한 변용을 통해서 비로소 새로움을 창출할 수 있다는 창작 태도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최지윤은 수묵화에서 주요하게 다루었던 여백의 문제를 끌고 와 자신의 현대적 채색화에 의미를 부여한다. 즉 장지 위에 종이색 자체로 비워둔 여백 대신 단색의 안료로 가득 채운 여백을 창출한다. 그것은 채색과 수묵이 변별되어 온 두 전통을 지금, 여기에 계승해서 하나로 병합하는 방식으로 현대화한 셈이다. 게다가 형상이 복잡하게 연결된 채색화의 구도 대신 단색의 여백 위에 올라선 형상 자체를 매우 긴장감 있게 구성하는 문인화의 구도 방식을 일정 부분 따름으로써 이러한 두 전통을 새롭게 변용하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최지윤은 채색화의 근간 속에서 실천하는 이러한 수묵화의 필법을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실험한다. 보석의 표현 방식이 그것이다. 마치 실제 사진을 오려 붙인 것처럼 보이는 보석 이미지는 그녀가 장지 위에 담묵의 번짐을 집요하게 실험하고 적용한 결과물이다. 보석의 반짝이는 효과를 위해 수묵의 효과를 활용하고 미디엄을 섞어 표면을 코팅 처리함으로써 ‘작은 보석’의 실재감은 극대화된다. 세필로 먹선을 그어 밑그림을 그리는 채색화의 방식 대신 혼합재료로 색을 직접 올리는 방식도 두 전통의 방식(법고)을 해체해서 지금, 여기에 새롭게 구현(창신)하는 실험이 된다. 둘째, ‘한국화의 서구적 융합’이 병행된 조형 실험‘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간단히 말하면, 재료와 조형 방식의 혼성으로 정의할 만하다. 대표적으로 한국화의 전통이 표방하는 필수 재료인 지필묵 중 최소한 어느 하나를 서구의 재료로 치환하는 방식을 통해 동양과 서양의 회화 방식을 만나게 하는 것과 연동된다. 배접된 한지를 화판 위에 표구하는 방식이 아닌 서구 회화의 바탕인 캔버스를 도입하여 종이 대신 천의 물성을 실험하는 것은 아주 흔한 방식이다. 최지윤 또한 이러한 캔버스와 장지의 만남을 실험한다. 먹, 아교와 같은 동양의 전통 재료뿐만 아니라 아크릴, 겔 미디엄, 크리스털 레진 등 화학 실험을 거친 다양한 서구 미디엄을 도입한 것도 이러한 실험 중 하나라 할 것이다. 사각의 캔버스 모양을 원형, 타원형과 같은 모양으로 변형하는 실험은 또 어떠한가? 또한 캔버스 위에 낮은 부조의 방식으로 특수 매제를 올린 후 굳혀 두꺼운 마티에르 효과를 내는 방식 또한 한국화에서는 여간해서는 시도되지 않던 조형 실험이다. 이 위에 여러 색의 안료를 뒤섞어 창출하는 마블링 효과 또한 한국화의 서구적 융합 실험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무엇보다 최지윤의 작업에서 대표적인 융합 실험은, 장지에 그림을 그린 후 형상을 오려내고 그것을 캔버스에 옮겨붙이는 콜라주, 더 정확히는 파피에 콜레(Papier collé)에 관한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을 은유하는 보석으로 된 각종 동물 형상뿐만 아니라, 세밀한 줄기와 잎을 지닌 꽃 형상을 일일이 오려내고 캔버스로 옮겨오는 수고스럽고 지난한 노동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작가가 직접 그린 이미지를 잘라 다른 장소로 전이한다는 점에서, 저자가 다른 원본을 전이하는 서구의 데페이즈망(dépaysement) 전략과는 일정 부분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아울러 물감이 미세하게 나오게 만든 특수 도구를 통해서 무수한 꽃술을 점묘법처럼 표현하는 방식도 그녀만의 새로운 융합 실험으로 평가해 볼 수 있겠다. 셋째, 앞서 살펴본 ‘한국화 전통의 현대적 계승과 변용’ 그리고 ‘한국화의 서구적 융합’이 병행된 조형 실험에 덧붙여 시간의 공력과 세밀한 정성, 그리고 지난한 노동력을 투여하는 장인적 작업으로 비롯된 완성도의 측면에 관한 것이다. 현대 미술에서 ‘완성도’라는 이름으로 회화의 밀도나 조형적 완결성을 평하는 것이 무의미해진 시대가 되었음에도 최지윤의 회화에서 그것은 매우 주요하다. 그것이 단순히 창작하는 순간의 노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화가로서의 삶의 태도와 맞물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IV. 에필로그 최지윤의 〈사랑하놋다〉 연작은 사랑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것은, ‘받은 이후의 사랑’이라고 할 만하다. 꽃과 같은 자연에 담긴 신의 사랑과 모성애와 같은 ‘받은 사랑’과 더불어 보석이 은유하는 언약으로서의 사랑과 같은 ‘주는 사랑’을 두루 아우르면서도, 인간의 능동적 사랑하기를 더욱더 요청하는 까닭이다. 꽃과 자연에 담긴 사랑의 정신을 추적하는 것에서부터 인간을 은유한 동물과 혼성한 보석에 담긴 사랑의 메시지를 탐구하는 그녀의 작업은 결국 ‘동물=보석=꽃=자연=인간=삶’으로 연동되는 인간 사랑에 관한 내용으로 귀결된다. 한편, 그녀의 작업에서 채색화 전통을 변용하고 융합하는 다양한 조형 실험을 통해서 전하려는 인간 사랑의 메시지는 ‘지금, 여기’의 자리로 현실감 있게 바짝 내려앉는다. 특히 한국화에서의 여백 전통을 단색면으로 전환하여 확장하거나, 채색화의 주된 형식 안에 수묵화의 필법을 상시 병행하는 방식과 같은 전통의 현대적 계승을 주목해 볼 만하다. 또한 한지 위에 그린 형상을 잘라내고 콜라주 형식으로 캔버스 천 위에 다시 옮기는 방식이나 한지 위에서 실험하는 마블링과 같은 혼색의 방식은 한국화의 서구적 융합을 매우 효과적으로 성취한다. 여기에 덧붙여 시간의 공력과 정성을 들이는 최지윤의 작업 태도는 ‘사랑’이라는 주제와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하기에 족하다. 사랑이 무수한 주체와 대상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동사적 사건’이자, 실천이듯이, 그녀의 작업의 근간에는 ‘꿈틀거리는 생명성’과 같은 동사적 움직임이 자리한다. 기(氣)와 같은 보이지 않는 운동 에너지 또는 몸의 진동 혹은 파동과 같은 생명 에너지로서 말이다. 최지윤의 작업에서, ‘사랑하기’와 같은 ‘보이지 않는 움직임 혹은 생명성’과 같은 동사의 의미를 가시화하는 근원적 힘은 ‘시간의 공력’과 같은 것이다. 관련한 작가 노트를 살펴보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나는 시간의 공력을 믿는다. / 내가 좌절했던 시간, 어둠 속에서 하나의 빛을 향해 걸어온 시간, / 내가 붓을 들고 있었던 시간, 고뇌 우울, 눈물, 분노, 사랑, 기쁨의 시간. / 이 모든 시간의 힘을 믿는다. / 내가 붓을 들고 있던 시간은 때론 과역(課役)을 수행하는 것처럼 / 고통과 눈물도 따랐으나 그 고뇌 또한 공력의 시간이었음을... / 산이 오랜 세월 어떠한 생명체보다도 풍성한 생명력과 섬세한 아름다움과 마를 줄 모르는 정열을 지니며 살아있는 것처럼, 나의 그 모든 시간이 쌓여 / 내 작업의 생명이 되고 영혼이 되어 내 옆에 살아 있는 것이다.”
(2024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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