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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7 제17회 정기전 세미나자료- 여성성과 자연미
작성자 우먼아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7-07-22 18:02    조회 4,245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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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성과 자연미

    김미진 홍익대학교 교수

     

    작가의 작업은 시대정신, 매체에 대한 선택,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의 결실이다. 그룹이나 동문전의 성격이라 할지라도 이런 개인적 작업이 우선적이지 공통의 요소로 비평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화여성작가회에서 공통의 미적 요소로 자연적 소재 안에서의 해석할 수 있는 여성성을 발견할 수 있다.

    여성작가들의 자연에 대한 작업은 우선 직감적인 감성으로 꽃, 나무라는 식물적 이미지에 자신을 투영하거나 산, , , 바람 이라는 외부환경을 통해 조화나 공존의미를 담아낸다.

    특히 한국화를 표현하는 여성작가들은 우주합일이라는 자연관을 바탕으로 하는 동양정신과 수묵기법이 작업의 근원이 크게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이번 세미나는 자연미와 여성성의 근원적인 관계와 의미를 본인의 연구 중 한국적 정체성에 기인한 자연미연구안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적 자연주의 정신적 뿌리는 주자학에서 중국과 철학적 차이점을 보인 퇴계이황에서 찾아본다.

    김원룡은 한국 고미술에는 여러 가지 양식이 있으나 기본적으로 그 바탕에 흐르는 하나의 한국적 양식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을 우리는 자연주의라 부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인 자연주의로 돌아가는 형상을 반복하고 있다. 전체적으로는 부드럽고 평화롭고 인간미가 있으며 가식이 없다.

    따라서 우리 고미술품에는 당당하고 완벽하고 존대스러운 예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이러한 우리나라미술의 기본적 양식에 대해서 중국이나 일본의 그것은 상징적이고 표현주의 경향이며 우리 것과는 뚜렷한 대조를 부여해 주고 있다.(중략) 솔직히 말해서 나는 왜 우리나라에서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은 한국적 자연주의가 나타났는지 그 이유를 꼭 꼬집어서 지적할 수가 없다. 제작하는 마음이 순수하고, (중략) 비록 사람의 손으로 만들기는 하였지만, 거기에서 사람의 냄새를 빼고 형이나 색이나 자연 그 자체의 것으로 남기려는 의도가 있다. 아니 여기서 의도라는 말을 써서는 안 될지 모른다. 이 장인들은 그러한 의도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

    퇴계((1501-1570)는 조선 왕조 중엽 16세기 후반 명종, 선조시대에 활동하였던 학자로 조선의 풍토에 성리학 사상의 이론을 확고하게 정립하여 성리학의 철학적 수준에 한국 유학의 특성과 방향을 정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며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는 또 동방의 희 주자(1130-1200)라고도 일컬어 졌고 중국의 주자학과는 차별성 있는 한국주자학을 열었다고 평가받으며 그의 퇴계학은 일본으로도 전해져 근세의 덕천막부시기와 근대 일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퇴계는 주자(1130-1200)를 표준으로 삼아 도학의 철학적 근거를 밝히고 인격적 실현을 추구하였다. 그는 성리설을 개념적으로 체계를 세워 분석하였고 수양론을 통해 실천하는 방법을 긴밀하게 연결하여 상호 조명하였다. 최근에는 이런 인간 삶에 실천적인 부분을 강조한 퇴계의 학문에 우리나라 학자들보다 외국에서 더 주목해서 연구하고 있다.

     

    다음은 주자학을 동아시아 근세의 보편철학이라고 말하며 이황을 포함시켜 송리명리학사를 저술한 중국학자 진래가 이황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이황은 주희 철학의 계승자다. 리학발전사의 입장에서 중요한 점은, 이황이 주희의 어떤 사상을 저술했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주희의 사상을 어떻게 발전시켰는가에 있다.

    그는 주희의 철학을 깊이 있게 이해하였으며, 주희의 철학이 지닌 어떠한 모순에 대해서도 심도 있게 인식하였다. 동시에 한걸음 더 나아가 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적극적인 방법까지도 제시함으로써 주희의 철학에 감추어져 있으면서 아직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던 논리적 연결 고리를 드러내 주었다. 동아시아 문화권의 관점에서 볼때, 주자학의 중심이 동쪽으로 옮겨가는 과정이 있었다. 명대 중기 이후 중국 대륙에서는 생명력이 있는 주자학자를 다시는 배출해 내지 못했다(陳來, 1997a:47)

    먼저 주희가 말하는 성리학을 살펴보면 그는 자연과 우주가 만물을 생성 근본이라 보고 다음과 같이 이기론을 펼쳤다.

    우주에는 리도 있고 도 있다. 리란 형이상 도이며, 만물을 생성하는 근본이다. 기란 형이하 도구이며 만물을 생성하는 재료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사물은 생성될 때 반드시 이 리를 품수한 연후에야 본 성을 가지며 이 기를 품수한 연후에야 형태를 가진다

    이 리기理氣론에서 사물은 리와 기의 결합으로 이루어지고, 리기의 결합방식차이에 따라 사물은 다양한 모습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리는 중국철학사에서 아주 오랜 이전부터 존재하던 철학 개념이며 형이상과 형이하라는 개념도 이미 주역에서 형이상을 도라고 하며, 형이하를 기라고 한다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다.

    그것은 장자의 사물과 조화롭게 어울림의 철학적 근원을 갖고 있기도 하다

    한국의 퇴계가 말한 성리학은 이런 주자학의 영향을 받았지만 우주와 자연, 사회를 인간의 본질과의 관계를 통해 조화롭고 균형 있게 사는 삶에 더 중점을 두며 발전시킨 학문이다.

    주자학이나 퇴계의 학문을 간단하게 요약하기는 매우 힘드나 퇴계의 제자 문봉 정유일은 공경과 의리를 지키고, 지식과 행위를 함께 나아가게 하며, 겉과 속이 한결같고, 뿌리와 가지를 함께 들어올리며, 큰 근원을 꿰뚫어 보고, 큰 근본을 일으켜 세운다퇴계선생언행통록에서 언급하고 있다.

    퇴계의 학문 중 그의 사상적 자연미를 잘 표현한 시 한편을 예로 들어 살펴보고자 한다.

     

    불이不二의 자연미

     

    밝은 달은 하늘에 있고 明月在天上,

    그윽이 묻혀 사는 사람은 창 아래에 있다 幽人在窓下.

    금빛 물결이 맑은 못에 굽이쳐 흐르되金波湛玉淵,

    워낙 둘이 아니라 本來非二者

     

    퇴계의 이 시를 해석해 보자면

    밝은 달은 하늘에 있고 明月在天上

    추석대보름 꽉 찬 둥근 달이 세상을 환하게 비출 때를 묘사한 것이다.

    하늘에 떠 있는 달은 우주 스스로의 시간의 법칙에 의해 초생달로부터 만월이 되었다. 이것은 리의 법칙에 따라 하늘에 떠 있으며 우리 눈에 완벽한 둥근 달의 형태로 보인다.

     

    그윽이 묻혀 사는 사람은 창 아래에 있다.幽人在窓下

    사람이 그윽이 묻혀 산다는 것으로 봐서 그 사람은 자연에 오랫동안 살아 왔고 그 환경에 완전히 융합한 태도와 마음상태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금빛 물결이 맑은 못에 굽이쳐 흐르되金波湛玉淵

    하늘아래 대지의 못에 있는 물은 안에서 흐르는 곳이 있어 맑다. 외부의 바람, 나뭇가지의 흔들림 등으로 물결은 흔들리고 비치는 달의 형태는 물과 하나되어 부서지며 굽이쳐 밝게 드러낸다.

    워낙 둘이 아니라本來非二者

    밝은 달이 물결과 하나 되어 보여주는 금빛물결이 바로 워낙 둘이 아닌 하나 되는 불이不二를 말한다.

    퇴계의 자연미는 외부에서 그 경치를 구경하러 들어간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오랫동안 자연과 화합된 몸과 마음을 닦은 사람이 온전히 자연의 이치와 맑은 못이 담아낸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은 움직임 속의 형상 그리고 그것을 보는 사람이 고스란히 그 모든 것을 담아내면서 표현하는 미적 감정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또한 마음이 태극이 되는 것은 이른바 인극이라는 것이다. 이 이치에는 사물과 나의 구별이 없고, 안과 밖의 구분이 없고, 나누어짐도 없고, 형체도 없다. 한데 뒤섞여 일체를 온전히 다 갖추고 있으니 이것이 하나의 근본이다”.

     

    자연의 이치와 함께하는 사람과 사물들은 그 이치로 채워지고 이것이 세상의 근본이 된다: 형체도 없고 안과 밖의 구분도 없다. 채워져 있는 마음이 바로 만물을 몸으로 삼는다. 자연과 함께하는 이치를 깨달은 사람의 마음의 본체는 맑은 물로 대입될 수 있다.

    동양에서 자연은 홀로 존재하고 저절로 있는 상태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퇴계는 자연에 맡겨둔다(仕自然), 자연을 즐기다(樂自然), 기화의 자연(氣化之自然), 자연에 합하다(合自然), 이치의 형세가 저절로 그렇게 되다(理勢自然他)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였다. 자연은 사람의 의도적인 행위와는 다르게 그 스스로가 그렇게 흘러간다는 것을 뜻한다.

     

    사람을 위한 학문을 강조한 퇴계는 교육과 학습의 방법에서 시간의 경과와 공력의 축척에 따른 자연발생적인 문제해결 방식을 강조할 때 자연이란 단어를 사용하였다.

    다만 말없이 더욱 노력하여 전진하기를 그만두지 않고 오랫동안 연습을 쌓아 완전히 숙달되기에 이르면 자연히마음과 이치가 하나가 되어 얻는 대로 잃어버리는 그러한 병폐가 없을 것입니다

     

    퇴계는 천지우주의 존재구조와 인간의 구조와 다름이 없다고 말한다.

    이렇게 인간을 비롯한 모든 만물이 자연처럼 겉과 속이 다르지 않고 이치가 하나 되는 것이 형태를 이룰 때 아름다운 미적가치가 생기는 것을 자연미라고 할 수 있다.

    미술사학자 정양모는 한국의 자연미가 자연 사물의 형식과 실질이 가지는 객관적 속성의 하나며 자연 사물에 드러난 자연사물의 아름다움을 일컫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자연미가 가장 잘 나타나는 것은 16세기 분청사기와 17~8세기에서 보여주는 조선 백자 달 항아리라고 할 수 있다.

     

    먼저 달 항아리는 하늘에 온전히 떠 있는 완벽한 만월의 달 형태가 아니다. 이 달도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둥근 형태는 전체적으로 둥근 곡선을 이루지만 비뚤게 대충 형태를 따라 빚어진 것처럼 보인다

    만월에 하늘에 떠 있는 달의 형상은 이상적이고 완벽한 큰 원형이다. 그러나 사람이 가깝게 관찰할 수 있는 물에 비친 달은 주변의 나뭇잎, 바람, 물결 등 다른 사물과 상황에 의해 잠시라도 가만히 있지 않고 흔들리는 현상에 완벽한 하늘의 달 모양으로 포착될 수가 없다.

    예술가는 하늘에 떠 있는 완벽한 아름다운 형태와 대지의 못에서 금빛 물결로 흔들리며 부서지고 있는 달빛의 상황 모두를 작품에 담아내고자 한다.

    고정되어 있는 완벽한 형태는 일시적인 예술적 감상대상으로 존재할 뿐이다. 달항아리의 불완전한 형태는 움직이는 변화를 담아내고 하얀색이 아닌 누런 유약의 자국들은 대지()의 흔적까지도 지니고 있다.

    도공은 오랫동안 자연을 관찰하고 흙을 빚어온 그윽이 묻혀 사는사람으로서 흔들리는 달빛으로서만 이 아닌 온전한 자연의 본래 이치()와 작가의 지각된 감각()를 그대로, 저절로 혼연일체로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달항아리는 하늘의 법칙과 대지의 감각을 고스란히 드러낸 도공의 겸손안에서 감상자의 마음이 일치되어 모든 것이 하나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본성, 원칙이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도공과 일치되어 선함 그 자체를 드러낸 것이다. 이것이 퇴계가 말하는 자연미이며 정양목이 말하는 전혀 새로운 도자기로 백자는 검박하고 결백하며 어떤 규범과 제식 속에서 절제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보다 앞서 16세기의 분청사기 중 덤벙기법이나 귀얄무늬기법으로 만들어진 도자기는 원래의 흙색인 회색 또는 회흑색으로 빚은 그릇 위에 흰색의 묽은 흙에 덤벙 빠르게 담갔다가 빼내거나 귀얄이란 거친 솔로 칠하여 최소한의 장식을 하여 깊고 깊은 효과를 보고자 한 것이다.

    분청사기는 회색, 백색, 철 흑색의 태토와 그 위를 바람의 결처럼 덮어 우러나오거나 덤벙 담그면서 만들어지는 자연스러운 배색에 의한 다양한 색조는 마치 현대 추상화처럼 보인다. 이 양식은 1~2세기 동안 잠깐 선보이다가 사라진다.

    이 예술작품들을 통해 퇴계의 리가 변하여 인간의 도덕적 자율성에 미치는 것이 주희의 뜻이나 생각의 움직임이 없는 리와는 다르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박성배의 글을 인용하자면 그가 믿는 리는 죽어 있는 물건이 아니고 항상 살아서 신비스럽게 일하는 리이며, 그리고 그러한 리가 하는 일은 안 미치는 곳이 없고 일하지 않는 때가 없기 때문에 이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 우리의 귀에 들리는 모든 것, 우리의 손에 만져지는 모든 것이 하나도 빠짐없이 모드 리의 나타남이란 말이다. 그러므로 항상 일상적인 현실을 떠나서 따로 리를 찾고 경을 한다면 이는 큰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윤리와 철학, 종교가 혼연히 한 몸이 되어 유기적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는 세계가 바로 퇴계의 경지이다.14

    지금까지 살펴본 한국의 자연미는 실천과 함께 살아있고 변화하는 관계 즉 이렇게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수용성의 관계안에서 나타난 것임을 알수 있다.

     

    이런 수용성안에서 주체와 객체의 시선을 주고 받는 자연미는 여성성의 특징이기도 하다.

    여성성을 도가사상에서 살펴보면 자연관찰을 통해 관용적 양보하며 정성스럽게 물러날 줄 아는 신비스러운 것이라 하고 있다. 부드럽고 연약하며 양보하는 여성적 수용성은 천하와 화해, 조화를 말한다.

    그리고 수묵에서 서로 흡수하고 내뱉는 자연스러운 관계와 명암 없이 선만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세밀한 관찰과정의 은유를 통해 대상의 생장법칙과 조직구조를 끌어안은 자연미를 볼 수있다.

    조화를 아는 것은 늘 그러함’, ‘저절로라는 노자에서 말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