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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두 겹의 그림자 노동 - 이선영(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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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겹의 그림자 노동

 

--한국화 여성작가회 20주년 정기전에 부쳐--

 

이선영(미술평론가)

 

 

 

1부 이론적 배경

* 평생직업인 작업

누구나 전업 예술가를 꿈꾸지만, 남성 작가들 못지않게 여성 작가들 역시 일과 작업을 병행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미술에 관련되거나 아닌 직업의 세계에서의 공식적인 일은 물론이고, 가정으로 대변되는 사적 영역에 속해 있는 일이 그것이다. 그러한 일의 세계 또한 작업하는 삶과 상호작용하면서 작품에 반영되곤 한다. 그러나 여성들 상당수가 행하고 있는 사적 영역에서의 일은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것이면서도, 아무런 대가를 받을 수 없는 그림자 노동(shadow work) 취급을 받는다. 사적 영역에서의 노동은 공적 노동과 달리 평생 지속된다. 정규직이 아닌 한, 한 직업이 지속되는 기간은 점차 짧아지고 있지만, 사적 영역에서는 거의 은퇴라는 것이 없다. 여성이 맡은 가장 힘든 일 중의 하나인 출산과 육아의 경우, 20-30대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공백기로 지나치게 한다. 삶의 전 영역에 걸쳐 사회화와 상품화가 확장되었어도 결코 피할 수 없으며, 심지어는 더욱 비중이 커져만 간다.

작업이라는 것이 평생에 걸친 것이라고 할 때, 이 시기를 어떻게 ’현명하게‘ 보냈는가에 따라 작업의 지속성이 가능하다, 인생의 많은 기회들처럼 작업 또한 한번 놓은 끈을 다시 붙잡기 힘들다. 남성 작가도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지만, 미술 관련의 공식적인 직업에 여성보다 훨씬 많이 진출해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남성 작가들은 집안일과 화업을 동시에 잘 수행해야 한다는 압력을 여성 작가만큼 받지 않는다. 심지어 부부가 같이 작가라면 여성이 양보해야 하는 일도 적지 않다. 사회가 점차 합리화되면서 개선되고는 있지만, 여전히 집안일로 대변되는 그림자 노동은 작업하는 삶과 상충되는 영역에 속함은 틀림없다. 더 나아가 예술 또한 무조건 헌신해야 하는 그림자 노동의 영역에 속한다. 작가이자 여성은 이 두 가지 그림자 노동의 현실과 싸워야 하는 입장에 처해 있다. 그것은 이중고이기도 하지만, 부정의 부정을 긍정으로 전환할 필요도 있다. 그동안 이 그림자 노동의 영역은 각자가 개별적으로 극복하고 넘어가야만 했으며, 그것이 불가능했다면 작업을 포기하거나 짬 날 때만 근근이 작업을 이어가야 하는 상황이 빈번했다.

그러나 여성이 흔히 직면하는 이러한 현실적 삶은 대개 억압되기 일쑤였다. 그것은 현실로 드러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주부 우울증과 관련된 사건사고를 통해서나 가끔씩 공론화될 뿐이다. 더구나 예술은 자잘한 일상적 삶을 초월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떤 부류의 작가는 삶의 마지막 해방구에 삶의 고난이 묻어나서는 안된다고도 생각한다. 초월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사회는 일상사에 초월할 수 있는 자와 그럴 수 없는 자로 나뉜다는 것이다. 타자들에게 더 잘 보이는 이 현실을 예술은 무시할 수 없다. 예술은 초월할 수 없는 현실을 초월한 척 하면서 허공에 붕 뜬 삶과 일치될 수 없다. 여성/작가가 처한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의식 속에서 한국화 여성작가회처럼 오랜 연혁을 가진 여성 예술가 그룹은 작업에 몰두하는 삶이라는 이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한걸음에 적극적으로 발언을 할 자격을 가지고 있으며, 또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그녀들이야말로 삶의 훼방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작업을 이어왔던 이들이며,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한국 미술계에서 여성의 현실을 담아온 작품은 없지는 않다. 그러나 현실의 동어반복 식의 단순 반영이나 이데올로기에 치우친 관념적이고 거친 작품들로 양단된 상황은 다수의 여성이 자기의 것으로 삼기 어려운 어떤 문턱을 만든다. 한국화 여성작가회는 자신의 현실로부터 시작되는 문제의식을 적절한 조형적 어법으로 발언하기에 충분한 잠재력을 가진 작가들이 다수 포진한 단체이다. 우연찮게도 올해 맞는 20주년은 인간의 삶의 주기로 치면 성년이다. 여성들이 가족을 이루어 자식을 낳고 키워온 여성이 이제 자신의 작업에 올인해도 누가 나무랄 수 없는 상징적인 시간이기도 하다. 사적 영역을 공론화하는 이러한 주제는 한국화 여성작가회가 한 번쯤은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된다. 작업하는 여성의 삶을 주제로 한 전시는 폭이 넓으면서도 강한 주제 의식을 보여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것은 우선적으로 여성으로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자의식이 담긴 작품과 관련된다. 그러한 자의식은 잔잔한 서정부터 강력한 이의제기까지 큰 폭의 내용을 담아낼 수 있을 것이다.

* 가족과 여성

여권주의자들이 ‘부권제의 주요제도는 바로 가족’(줄리엇 미첼)이라고 보면서 가족제도를 주요 공격 목표로 삼았지만, 자아의 연장이기도 한 가족은 소중하다. 사회안전망이 부실하면 온전히 그 구성원의 운명을 도맡아야 하는 것도 가족이다. 이러한 사정이 가족을 따스하면서도 억압적인 양면성을 야기했다. 급격하게 변화 중인 현대의 인간관계의 속에서, 가족은 선택의 문제가 되는 경향도 있지만, 일단 선택이 된 이후 가족의 생산과 재생산, 그리고 그 유지와 발전에는 많은 심적 물적 에너지가 투입되어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거기에는 공적 사회가 온전히 분담할 수 없는 미묘한 영역이 있다. 이제 전통적으로 여성이 감당해온 감정 노동 등도 모두의 문제가 된 것이 현실이지만 말이다. 전통이 여성에게 가해온 오랜 가부장적 억압이 핵가족으로 대변되는 현대의 가족제도가 극복했는지는 의문이다.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 생태학적 사고를 주장하는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오래된 미래]에서 전통적인 대가족에도 장점은 있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노인들과 여자들과 아이들에게 특히 유리했다고 보면서, 근대의 핵가족은 늙은 사람들을 배제하는 것과 동시에 여자들을 가둔다고 보았다. 저자에 의하면 전통사회에서 여자들은 가정과 일 사이에서 선택할 필요가 없었다. 가정은 경제의 중심이고 두 영역은 하나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여성 중심의 비공식적인 분야가 공식적인 분야보다 더 큰 역할을 하는 전통적 사회에 국한된 것이긴 하다. 근대가 아무리 비판의 대상이 될지라도, 여성 예술가 자체를 거의 낳지 못한 전통의 시대보다는 진보적이다. 그러나 진보는 지배적 질서에 취약한 계층에게는 더욱 가혹하게 작동되는 양날의 칼이다. 자유로운 예술가가 어떤 시대보다 폭발적으로 많아진 근현대에 여성 예술가의 비중을 본다면 큰 차이는 없다. 작가층이 두터워야 소위 말하는 ’위대한 여성미술가‘도 많이 나오지 않겠는가. 여성의 지위에 있어서 전통이 근대보다 더 열악한 것만은 아니었다. [오래된 미래]가 말하듯이, 경제의 중심은 가정이고 남자들이 주도하는 경향이 있는 공적인 영역은 산업화된 세계에서보다 훨씬 적은 중요성을 가졌을 때 여성의 자리는 보다 분명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되돌릴 수는 없는 역사적 과정이지만, 사적 영역이 삶에 차지하는 비중을 드러낸다. 근대에는 공적/사적 영역의 구분이 더욱 가속화되면서 삶의 총체성은 무너졌다. 예술은 잃어버린 총체성의 복구에 대한 기대치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예술이 진보적 정치 운동과 연합했던 주요한 이유이기도 했다. 여기에는 여성운동 또한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근대적 분화와 분업을 차이가 아니라 차별로 만드는 과정의 지속이었으며, 전통으로부터 개인을 해방이라는 사상을 무색하게 했다. 이제 여성도 사회에 많이 진출해 있지만, 여성이 사적 영역에 머무는 선택을 했던 결정적인 요인은 공적 영역에서의 직무 및 임금의 차별일 것이다. 특히 공적 영역만이 경제적 가치의 생산지로 강조되면, 집에 남아있는 여자들은 더욱 ’눈에 띄지 않는 그림자 같은 존재‘(노르베리 호지)가 된다. 여성이 사회에서 격리되고 이후에는 가족들로부터도 격리되며, 유일한 소통 채널은 소비자로 귀결될 때(또는 그런 소비로부터도 소외될 때),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 속에서 자신의 자리가 분명했던 전통시대의 여성보다도 더 열악한 상황에 처해질 수 있다.

여성/작가의 작품에서 가족은 가족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낭만적 사랑‘(재크린 살스비)과 행복의 이미지부터 그것이 배반되었을 때의 고통과 고뇌, 극복 또는 포기의 과정이 드러난다. 가족과 예술이 모두 소중한데, 한정된 물적 심적 육체적 자원 때문에 어느 하나를 소홀히 할 수 밖에 없을 때, 잔인한 양자택일 앞에서의 죄책감이나 자책감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다. 수퍼우먼 같은 완벽주의적 여성상이 추구될 때, 예술은 후 순위로 밀려나기도 한다. 아니면 어정쩡한 타협 속에 삶의 장식에 머물고 만다. 무엇이 더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개인에 달려 있으며, 가족을 보살펴야 한다는 여성의 주요 미션에도 불구하고 예술을 하지 않으면 못 견디겠는 이들이 결국은 작업을 지속할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여성/작가의 의지를 존중해주지 않는 가족/사회에 희생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의문과 의미는 여전히 남아있다. 가사와 작업이라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잘 수행한다 해도 소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 작업과 그림자 노동

불행히도 박탈감은 더 열심히 한 사람의 몫이 되는 경향이 있다. 여성/작가의 이중 삼중의 그림자 노동의 경우, 상대적 박탈감 정도가 아니라 절대적 박탈감이다. 이반 일리치는 [젠더]에서 경제학이 측정하는 모든 것에 있어서 여자는 덜 얻는다고 본다. 그것은 여성의 경제적 차별과 종속을 낳았다. ‘자본주의의 시대와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는 현대’(마르크스)에서 생산은 본질적으로 다수의 타자들도 생산한다. 경제적인 것으로 모든 것을 환원하는 경향이 자유를 소유로 간주하게 하였다. 이반 일리치는 비교적 최근에 확립된 인간에 대한 규정인 경제인, 즉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라는 패러다임이 남자와 여자가 실제로 존재하는 바에 들어맞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예전에는 성인이 되는 일은 경제적 과정이 아니었다. 그들 모두가 자기 지방 고유의 말과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 기능을 습득할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거의 모든 것을 돈으로 사야 한다. 그런데 모든 것이 상품화되면 상품을 구입할 수 있는 임금노동에 참여해야 하고 그렇지 못한 일들과 이들은 주변화 된다.

경제적 발전이란 일반적으로 생산이 보다 자본 집약적으로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이반 일리치는 특히 현금경제로의 전환은 이전까지 없었던 남녀 간의 격차를 초래했다고 지적한다. 경제성장이 경제적 차별을 증가시켰다는 것이 [젠더]의 주요 결론이다. 예술 또한 마찬가지 취급을 받는다. 가사노동과 예술작업은 가장 불리한 국면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여성/예술가는 이중의 질곡을 짊어지게 되었다. 하나만 잘 하기도 힘든 일을 도맡은 여성/작가의 작품에는 삶의 애환이 묻어난다. 여성 작가들의 작품은 남성 작가들보다는 덜 관념적이다. 이반 일리치는 보상받지 못하는 노동을 ‘shadow work(그림자 노동)’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그에 의하면 그림자 노동은 ‘한 상품에 추가가치를 더해 주기 위해 소비자가 행하는 무보수 노동을 지시하기 위한’ 용어이다. 그것은 보고되지 않은 비공식 부분이지만 GNP에 크게 기여 한다. 그림자 노동의 비중을 생각한다면, 사회가 돌아가기 위해 필요한 부의 생산에 있어서 사회적으로 처리되어야 할 부분을 개인이 해왔고, 특히 가족을 보살펴왔던 여성이 해왔음을 알 수 있다.

가사노동은 이제 공적인 평가를 받기 시작하고 있으며, 선진국 및 선진국을 향하는 국가에서는 여러 제도적 장치를 통해 사회적으로 분담되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그것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여성들의 꾸준한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가부장제를 비롯한 남성 기득권은 도전을 받지 않는 한 그대로 유지되려는 관성을 가진다. 한국사회에서 그림자 노동이 공론화된 것은 여성들의 ‘출산파업’ 등, 사회 구성원의 재생산 자체가 위기에 빠지면서 부터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 쌍의 남녀가 생산하는 아이의 비율이 급기야는 1명 이하로 떨어졌다는 최근의 통계가 있다. 노동자와 소비자의 감소는 자본에게 불리한 것이다. 가사노동보다 더 특수한 작업인 예술 또한 그림자 노동이지만, 그 그림자는 더욱 짙다. 예술은 무보수인 그림자 노동에 속하지만, 그림자 노동의 또 다른 요건인 사회적 필연성을 확보하고 있는가. 그 부분에 대해서 예술은 취약하다. 예술이 생산하는 것은 무엇인가? 얼마나 현금화되는가? 이러한 질문에 누구도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다.

예술은 씨앗이지 열매가 아니다. 잠재성이지 현실성이 아니다. 하나가 현실화되기 위해 하나만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즉 경제가 아무리 중요해도 경제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근대의 발전을 이끈 동력 중의 하나인 기초과학의 예는 당장의 결과보다 먼 안목의 투자가 중요하다는 점을 알려준다. 하드웨어는 세계적 수준이지만 마땅히 채울 내용이 없다거나 하는 문제가 있지 않은가. 소프트웨어의 문제뿐 아니라 하드웨어에서의 우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삶의 다양한 우회로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 예술작업이라는 거의 무상의 행위가 다시 공적 문제로 부상한 계기는 이제 사회의 많은 노동이 그림자 노동이 되어 간다는 점에서 온다. 생산보다 소비로 방점이 옮아가는 시대에 많은 것들이 감정 노동을 필요로 하고 또 자동화로 인한 비숙련 저임금 주변의 문제가 중심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소수의 문제는 다수의 것이 되었다. 여성/작가가 처한 상황은 개인적 고민으로 해결될 것이 아니라 보다 집단적인 차원에서 공론화될 필요가 있다.

* 작품의 분류

192명의 작가의 작품은 어떤 경향으로 분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악명 높은 ‘주례사’ 비평이 생겨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주례사 비평의 시대는 지나갔다. 필자는 여성/작가가 처한 이중의 그림자 노동을 돌파해온 192명의 작가들의 작품을 서술의 편의를 위해서 인간과 여성(26명), 동식물(52명), 정물과 풍경(54명), 추상(60명) 파트로 나누어 보았다. 물론 이러한 범주의 경계는 수시로 유동적일 수 있다. 이러한 묶음은 동질성 만큼이나 차이를 부각시킬 것이다. 192명의 작품 중 전시 맥락과 관련되어 더 중요한 것이 있을 수 있지만, 그림자 노동을 주제로 하는 전시인 만큼, 어떤 작품도 그림자화 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짧게나마 일일이 작품을 언급하는 과정에서 다소 기계적이면서도 나열적인 서술이 되었다. 미리 말해두지만 그것은 누구도 만족시킬 수 없는 서술 방식일 것이라 생각한다. 각 작가/작품에 대한 한 줄 묘사는 평론이라기보다는 전시장을 가득 채울 192개의 작품이 무작위로 보여지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분류 기준을 명시할 따름이다. 분절화는 연결을 위한 단위가 된다.

평론 또한 작업 못지않은 그림자 노동이므로 이러한 모자이크 같은 작업은 필자에게 그리 낯선 과정은 아니다. 하지만 비슷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이들의 작품들은 여러 우회로를 거쳐 만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여성/작가인 나/인간을 어떻게 표현하는가의 문제는 공적/사적 노동을 수행하는 주체의 문제이다. 이 여성적 주체는 공적 무대의 주인공인 ‘독립적인 남성’의 이미지와도 다르게, 스스로 타자이면서 타자와의 공감대를 위한 자리를 마련한다. 동식물은 그러한 주체가 바라보는 대상이자 은유적 주체로서 이야기한다. 특히 꽃이 많이 등장하는데, 통상적으로 여성이 꽃으로 간주 되었다면, 이 전시의 꽃은 예술이 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열매는 아니지만 열매를 예기하는 무상의 선물인 것이다. 정물과 풍경은 주체의 대상으로 소재화되기보다는 감정이 이입된 마음의 풍경이다. 마지막으로 추상은 무엇인가의 표현과 재현을 넘어 예술 언어의 자율성을 구가하려 한다. 예술이 자율적인 것이 되기 위해 자율적이지 못한 상황이 너무 많지만, 이 전시의 작가들은 작업에 몰입하는 것 외에 다른 돌파구를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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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193인의 작품

 

* 인간과 여성-26 작품

인간은 보고 보이는 관계 속에서 자기 정체성이 확립된다. 자신이 보는 나와 타자가 보는 나의 간극을 줄일 수 있을까. 정나래의 작품에는 마치 인스타그램 속 인물처럼, 보여주고 싶은 자신의 모습이 있다, 이승은의 작품에서 켜켜이 쌓은 이불 더미 위에 누운 여자는 편안함과 위태로움이 공존한다. 강유림의 [others-gazing]에서 보여지는 대상은 붉은 바탕에 상처같은 선이 확연하다. 안지수의 작품에서 어두운 사각 공간에서 빛나는 인물은 보고 수집하는 주체의 시선이 있다. 전은희의 [관람자들]은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는 냉랭한 관람자들을 멀찍이서 포착한다. 인간은 현재적 공간을 지각함과 동시에 시간 속에서 기억한다. 특히 한국화는 전통과 현대의 관계에 민감하다. 김정란의 [광화문을 거닐다]는 현대적인 한복 차려입은 관광객처럼 궁궐을 산책한다. 박소은은 한복입은 아름다운 처녀와 그림의 도구를 비롯한 소품들을 보물창고처럼 재현한다. 꽃내음 맡는 천진한 여자아이를 그린 백지혜는 전통적 기법으로 이상적인 풍경을 표현한다. 붉은 바탕에서 꽃밭 위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그린 김미정은 에덴 동산같은 시공간의 시원으로 회귀한다. 체계와 구조의 힘이 막강한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존재는 흐릿해진다. 흐릿한 실루엣만으로 인간의 표현한 김성희는 투명 인간화되고 있다. 빙글빙글 도는 판 속에 웅크린 사람들을 표현한 박연주의 작품은 자연의 법칙이나 사회의 규칙이 관철되는 모습이다. 체계는 인간을 존재가 아닌 하나의 기호로 삼기에 현대인은 고독하다. 업드린 여자를 그린 도근미의 작품은 얼룩으로 이루어진 머리와 몸통이 절망적으로 보인다. 푸른 공간 한쪽 구석에서 웅크린 여자를 그린 박미란은 도약을 위해 재충전 중이다, 채효진은 노란색 실루엣만으로 외로운 인간을 표현한다. 오경미는 인간들 간의 희미한 연결망을 통해 현대의 추상적인 관계를 표현한다. 오정혜는 하나가 둘이 되거나 둘이 하나가 되는 등 유연하게 이합집산하는 현대적 정체성을 표현한다. 박소현의 작품에서 인간은 조각조각 나눠진 기억에 의해 재구성된다. 이행순이 한지 캐스팅으로 표현한 인간은 상형문자처럼 보인다. 인간이라는 관념은 여성을 충분히 포괄하지 못한 면이 있다. 인간이 등장하되 여성의 자의식을 담은 작품이 있다. 김숙경은 40세에 다시 그림을 그리면서 주부보다 화가에 방점을 찍은 자신의 모습을 스승과 함께 표현했다. 무거운 것을 번쩍 들고 있는 여성 화가를 그린 김현숙은 삼남매의 어머니이기도 했지만 40년 화업을 이어온 뚝심이 느껴진다. 김화현은 소녀들의 문화인 로맨스 만화풍의 화법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린다. 김소정의 작품에서 꽃이 새겨진 여성의 다리는 미와 권력의 조합이기도 한 조각난 신체를 보여준다. 박민희의 작품에서 꽃과 중첩될 수 있는 인물을 받쳐주는 반영상은 조각조각 흐트러진다. 박소현 육아를 비롯한 여성에게 주어진 무거운 삶의 과제를 수행하듯이 초월하고자 한다. 김정수는 흔들리는 나무 위의 비상하는 독수리를 통해 예술이라는 무한으로 비상하고자 한다. 윤정례의 작품에서 와인 잔 바깥에서 나는 새에 타고 있는 여자는 평등한 이상향으로 날아간다.

* 동식물-53 작품

꽃과 식물은 한국화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소재이다. 그러나 그 상징과 맥락은 작가마다 다르다. 우선 꽃은 그 아름다움에 앞서 꽃한송이를 피우기 위한 노고를 떠올린다. 그것은 화가의 노고와도 비교할 수 있다. 김지현은 내부에 나뭇가지 같은 그물망을 가득 담은 생명의 에너지를 표현한다. 많은 띠들 한가운데 피어난 붉은 꽃을 그린 이윤정은 빛나는 성취 아래 깔린 끝없는 노력이 있다. 이희정의 아름아운 꽃다발은 예술이라는 것이 댓가를 기대하지 않는 선물같은 것임을 알려준다. 최혜인의 작품은 번진듯한 색선의 그물망의 속에 영근 열매가 똬리를 틀고 있다. 오정미는 노랑 꽃의 겉잎이 제 역할을 하고 떼어지는 것에서 그림자 노동의 본질을 본다. 먹의 농담으로 식물을 표현한 유희승의 작품은 생명의 희미한 흔적까지 포착한다. 하얀 꽃들 뒤에 녹색으로 전설 속의 동물을 그려넣은 전성은의 작품은 식물에 내재한 활동성을 표현한다. 정다은의 작품은 식물의 부분들이 연결된 얼룩으로 빛까지 포함한 숲 내부의 느낌을 담는다. 정유선의 붉거나 노란 꽃은 어두침침한 주변을 환하게 밝힌다. 정은하는 식물에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유려한 리듬과 생명의 약동을 본다. 조은령은 섬세하게 그린 작은 식물 그림들이 모여 정원을 만든다. 최가영은 밤에 환하게 밝히는 하얀 꽃의 무리들을 보여준다. 식물은 동물보다 먼저 지구에 자리를 잡은 생명력의 원천이다. 달을 향하고 있는 선인장을 그린 안예환의 작품은 달처럼 변화하면서도 영원한 이미지이다. 윤진숙은 도자기 같은 유백색 바탕에 잡풀처럼 자유롭게 자리한 생명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인애는 나무 형태 뿐 아니라 가지 사이의 에너지를 함께 그려 나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 식물의 절정인 꽃은 찬란한 아름다움과 더불어 그 짧은 기한 때문에 사랑과 비교된다. 정사각형 화면에 붉은 꽃을 하나 가득 그린 김선정은 충만한 대칭이 변화하는 순간을 담는다. 성민우가 그린 아름다운 부케는 반드시 아름답다고만은 할 수 없는 다양함을 품고 있다, 마법의 주문같은 제목을 가진 유경화의 작품은 가장 그럴듯한 것은 사랑이라는 마법임을 알려준다. 고혜림의 작품은 꽃잎이 구름처럼 모여들면서 가운데의 마르지 말아야 할 샘을 보호한다. 꽃은 행복과 축복을 상징한다. 장지에 수묵 채색 활짝 핀 꽃들을 위에서 본 시점으로 그린 서정완의 풍경에는 자연에 내재한 내적 질서가 있다.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소파 위에 꽃이 둥글게 있는 김경원의 작품은 한 아름의 행복을 전달한다. 김경인의 작품에는 개봉의 설레임을 주는 여섯 조각의 꽃이 포장되어 있다. 순수예술에서 장식이 차지하는 위상은 마티스에게도 확인되지만, 동양에서 양자의 경계는 더욱 없었다. 식물은 장식적 요소의 영원한 원천으로 나타난다. 김정숙은 화사한 바탕에 붉은 꽃이 둥둥 떠 있는 화면을 보여준다. 민선식은 하늘을 닮은 푸른 공간 속에서 잎새를 장식적 추상적으로 배열했다. 민유리는 푸른 물결 위에 평면적으로 배열한 붉은 꽃을 통해 다른 시공간을 겹쳐놓는다. 박미희는 식물의 외곽선 안에 또 다른 식물 이미지를 심어놓는다. 신지원은 꽃을 둥글게 배열하여 폭죽처럼 화사하게 표현했다. 안영나는 푸른 바탕에 꽃송이들을 배치했는데, 크고 작은 꽃이 모두 자기 자리를 잡고 있다. 안해경은 어두운 바탕에 꽃을 둥글게 배열하여 마치 달항아리처럼 둥글고 환한 얼굴을 보여준다. 작업실 문밖의 하얀 꽃들을 화면 가득 그린 이설자의 작품에서 꽃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풍요가 느껴진다. 식물이 가지는 장식적 요소는 추상적으로 패턴화된다. 이숙진은 화이트와 블루의 조화를 표현하기 위해 꽃이라는 소재를 화면에 불러들인다. 이애리는 행운과 사랑, 부와 복, 다산을 상징하는 꽈리를 화면 가득히 꽈리를 담는다, 이윤진은 [평면성에 관하여]에서 나무들의 중간 뭉치, 윗부분을 엇겨 놓아 재현이자 평면적 추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정지혜는 아무도 안 봐줘도 조화롭게 피어나는 꽃에서 열정의 빛깔을 본다. 주희는 바둑알처럼 수직 수평의 축을 맞춰 배열된 꽃송이에서 현현하는 감춰진 질서를 재현한다. 한수민의 활짝 핀 연꽃 그림 한 쌍은 부드러움 속에 강인함을 품고 있다. 꽃과 나비들이 흐드러지게 그려진 한은경의 [화훼사생]에는 전통적 기법의 시대에도 피어났을 동식물이 있다. 그림이라는 매체는 충만한 순간을 영원화 하는데, 그것은 개화의 순간이 주는 느낌과 유사하다. 이인실이 그린 꽃무리는 자유롭게 피어나 있으면서도 질서감이 있는 소우주를 이룬다. 봉오리부터 활짝 핀 단계까지 한 가지 안에 모두 포함되어 있는 정미혜의 작품에는 정지된 화면에 시간성을 부여된다. 한명욱의 작품에는 하얀 연꽃이 촉각적인 화면 위에 순차적으로 피어난다. 푸른 지구 위에 붉은 소파와 그 옆의 연꽃이 보랏빛 물결 위에 떠있고 남현주의 작품은 미술이라는 것이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을 교차시키는 것임을 알려준다. 동물은 살아있는 자연과 인간을 매개한다. 그것들은 우화적으로 때로는 생명력 그자체로 나타난다. 원형 화면에 공작새와 꽃을 그린 최지윤의 작품에서 공작새는 자연을 관조하는 작가처럼 보인다. 공작새는 대상이자 주체이다. 고순금은 대양을 헤엄치는 한쌍의 물고기에서 예술적 삶에 대한 희망을 담는다. 비단잉어들 위에 색색의 나비들이 날아드는 백용정의 작품은 자연에 편재하는 무늬들이 만나는 지점을 표현한다. 바탕에 나뭇잎을 배열하고 그 위에 다양한 색색의 나비를 배열한 소은영은 아름다운 자연을 수집하듯이 그린다. 이불 속의 귀여운 반려견을 그린 권민경은 휴식을 비롯한 인간의 욕망을 표현한다. 층층이 개어놓은 옷을 어지르려는 고양이의 뒷모습을 그린 이정은의 작품에는 천진한 개구쟁이의 사랑스런 모습이 있다. 비현실적으로 큰 검은색 꽃과 색이 빠진 듯한 잉어를 함께 그린 윤형선은 자연과 예술의 차이를 보여준다. 이민주는 내부가 선으로 채워진 말 두 마리의 만남을 통해 동물의 생명 에너지를 지진계처럼 반영한다. 이상형은 비상을 준비하는 애벌레 같은 것이 두툼한 지방층의 보호를 받으며 웅크리고 있는 모습을 통해 잠재성과 현실성의 관계를 암시한다. 이숙자는 오래된 벽에서 아직도 살아있는 듯한 신화적 동물을 그린다. 창공을 날으는 콘돌을 그린 허영은 거대한 새의 날개 일부만 그려 사라진 가운데 토막에 대한 상상력을 자아낸다.

* 정물과 풍경—54 작품

현대인은 자연이나 사람보다 사물에 더 많이 둘러싸여 있다. 그것은 소비사회가 열린 후 더욱 가속화되었다. 소비도 노동이 될 만큼 비중이 커졌고, 가정을 비롯한 사적 영역에서의 재생산 노동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차, 주전자, 풍선, 과일, 안경, 의자, 토끼 인형 등을 자유롭게 화면에 늘어놓은 이순애의 작품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많은 대상들을 보여준다. 꽃무늬 이불 위에 놓인 듯한 기와집이 있는 최승미의 작품은 삶의 기저에 놓인 여성의 노동을 생각하게 한다. 허순영의 작품은 후경의 전통 책가도의 잘 정돈된 모습과 하단의 유동적 화면을 대조한다. 이명임은 [무생산 노동]에서 다시 어질러질 것이기에 표시가 안 나는 그림자 노동을 말한다. 창안에는 그릇이 나란히 배열 바깥에는 하얀 꽃들이 가득한 최명자의 작품은 안과 밖 사이의 균형과 질서가 있다. 강렬한 붉은 바탕에 놓앤 두 개의 의자가 있는 임소형의 작품은 앞뒤의 차이만 있을 뿐 실재감의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화면에 배열된 다양한 사물들은 사물의 주인의 흔적들이다. 주체는 부재하지만 거기에는 주체의 기억, 무의식, 소망 등이 깔려있다. 박소영은 무의식의 흐름처럼 여러 이미지들을 배치한다. 작품 속 사물들은 맥락에 따라 다른 이야기를 하는 요소들이다. 바닷속 우체통에서 수평선 너머로 메시지가 송출되는 구여혜의 작품에는 소통 인플레 시대의 진중한 소통을 소망한다. 하승희는 추억의 단편들을 화면에 배열한다. 꽃과 함께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꽃병은 아름다움을 담는 용기(容器)로, 그 자체가 아름다움을 담는 예술작품의 은유가 된다. 즉 꽃을 담은 병의 묘사는 무엇인가의 재현이면서 그림에 대한 그림일 수 있다. 안재옥의 [정이 있는 풍경]은 꽃병에 담긴 꽃과 배경의 꽃이 같다. 즉 그림 또한 화병 같다. 둥근 화면 안에 화병, 화병에는 부채를 든 사람이 있는 김래형의 작품은 그림 속의 그림을 보여준다. 김승희의 작품은 푸른 꽃을 담은 도자기를 담는다. 김은희는 [행복을 담다]에서 도자기 접시 위에 연꽃을 한 쌍 담는다. 김지연의 작품은 이국적인 주전자 실루엣 위의 꽃은 향기를 보여주는 공감각적인 그림이다. 박은라의 작품에서 한쌍의 화병에서 민들레 홀씨가 날아가는 모습이 소통에의 희망을 표현한다. 한국화에는 대개 고풍스러운 사물들이 많이 등장하지만 새로움을 자랑하는 상품은 우리의 일상을 더 보편적으로 채우고 있다. 화려한 무늬의 소파의 한 자락이 흘러나와 노랑 구두와 만나는 여수진의 작품에서 옆의 새장은 소비생활이 마냥 자유는 아니라는 점을 말하는 것 같다. 유미선의 작품에서 접시 위에 놓인 것들은 자잘한 물건들 외에 집까지 포함된다. 이현미의 작품에서 1회 용기에 담긴 커피나 캔음료는 고풍스러운 정물화의 구도를 가진다. 임서령의 작품에서 정갈하게 차려진 밥상은 가족의 식탁을 차리는 여성의 노동이 담겨 있다. 여성 속옷을 잘게 잘라서 펼쳐 놓은 정문경의 작품에는 여성의 삶을 속속들이 분석해보고픈 욕망이 담겨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작가에게 우리 시대 풍경은 기법과 무관하게 자연스러운 출발점이 된다. 김미화의 [Apartments-섬]은 작은 정사각형 화면 4개로 구성된 아파트 풍경이다. 김민정의 [빌딩 숲] 2019 고층 아파트를 기하학적으로 표현한다. 정보연의 작품은 언덕 위의 교회가 푸른 하늘과 맞닿아 있는 한남동 풍경을 그린다. 그 아래의 다닥다닥 붙은 집들에는 질서와 조화가 있다. 빽빽한 밀도를 가지는 마을풍경과 잡초를 중첩시키는 진민욱의 작품은 자연과 사회의 유사점을 알려준다. 다닥다닥 붙은 재개발지 같은 마을의 풍경이 보이는 장은우 [소경산책消景散策]에는 도시 생태계의 단면이 드러난다. 들고나는 문이 안보이고 창도 부분적으로만 재현된 박나연의 붉은 벽돌집 풍경에서는 고립된 사적 공간에 대한 상징이 있다. 작가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분채와 꼴라주로 건축적 공간인 김지나의 [꿈꾸는 방]에는 안팎으로 자라나는 식물 이미지가 작업에 대한 비유가 된다. 시공이 연결된다면 자기만의 시간이 펼쳐지는 때를 휴식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 뿐 아니라 집 또한 휴식이 가능해야 하는 곳으로 기대된다. 잎이 넓은 식물, 작은 새, 바닷가 하얀 파라솔이 있는 구정선의 [작은 풍경]은 휴식이 있다. 최문아 [Island Rota]는 시간이 멈춘 듯한 이상적인 해안가 풍경이 있다. 초록산 뒤편의 바다, 그 위의 하늘을 그린 하연수의 작품은 현대인이 필요로 하는 자연의 이미지다. 백종숙은 가로로 긴 화면에 하얀포말이 있는 바닷물을 넣었다. 홍영주는 녹색에 푹 파묻힌 이상적인 작은 집을 그렸다. 변영혜는 신의 가호가 깃드는 집에 대한 염원을 신전 모양의 구조로 그렸는데, 그 안에는 긍정적인 기운이 가득하다. 울창한 대나무 숲 속에 안겨 있는 집을 그린 탁양지의 풍경은 이상적이다. 세한도 구도의 작품이지만 화사한 꽃으로 베일처진 하얀 집이 있는 류인선의 작품은 이상적인 집을 표현한다. 전통적 기법으로 그려진 풍경은 그자체로 지금 여기의 부정적 현실과의 거리를 둔 이상적 풍경으로 다가온다. 김경희는 붉은 꽃, 바위, 물이 만드는 풍경을 마음의 상태와 중첩 시킨다. 김귀인은 한지에 수묵담채로 오래전에도 있었을 그 억새 풀밭을 그렸다. 김원경은 산티야고 순례길에서 만난 자신과 신앙의 상징을 그려 넣었다. 푸른 바탕에 대나무를 시원하게 걸쳐놓은 박소영의 풍경은 구름 위를 걷는듯한 기분을 표현한다. 박은희는 [빛의 향연]에서 물과 식물 낮은 산에 가득한 빛을 수묵담채로 표현했다. 안개 사이에 걸쳐 있는 나무 숲의 중간 부분만 그린 박필현은 그곳에서 삶의 에너지를 본다. 송근영이 그린 봄풍경에서 전경의 꽃나무는 명암을 달리하며 겹겹이 멀어지는 산의 공간감을 더 강조한다. 단풍지고 낙엽지는 가을 풍경을 그린 오순이의 작품에서 자연은 아래로 내려가는 선들로 성장을 마무리한다. 먹으로 시원하게 그린 이세정의 수묵화에서 아래의 글자들도 풍경의 일부가 된다. 이진아는 식물의 잎들이 뭉쳐있는 추상적 표현으로 찬 이슬이 맺힌 듯한 차가운 숲을 표현한다. 동양화라는 단어를 대체한 한국화의 재료나 기법은 개방된 지 오래이고, 이를 바탕으로 눈에 보이는 광경을 풍경화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추세에서 수묵 산수화는 여러 방식중의 하나로 상대화된다. 칠보, 세라믹스, 골드 등의 혼합재료로 그린 김가빈의 풍경 속 달은 거의 태양만큼의 존재감을 가진다. 김가을은 판화지에 야광 물질을 비롯한 여러 재료로 빛나는 산수를 그린다. 김경신은 밝은 색/어두운 색으로 표현된 독도풍경을 핸드컷 페이퍼로 표현했다. 김은진은 군상을 떠올리는 붉고 푸른 나무숲 풍경을 보여준다. 서은경 홀로그램 박으로 붙인 화려한 식물들로 도시의 낭만적인 정원을 표현한다. 대각선 구도의 녹색 산 위에 푸른 하늘이 있는 윤수희의 작품에는 안정적 실재로서의 자연이 있다. 장현재는 나뭇가지들 위에 구름처럼 앉아있는 하얀 산을 그린다. 정현희 푸른 바다에 떠있는 빙하같은 섬들을 디지털 판화로 표현했다. 황윤경은 현대적 민화로 재탄생한 이상적인 동네 풍경을 그린다. 오래된 사물들이 등장하는 풍경은 관객을 기억의 풍경 속으로 초대한다.

* 추상-60 작품

조형언어가 세상을 비추는 투명한 창이길 거부하고 그 자체의 물성을 가지는 추상미술은 의미전달의 수단이 아닌 존재론적 위치를 가진다. 고은주는 부적같은 느낌의 꽃 패턴이 있는 한쌍의 작품으로 꽃의 상징적 의미를 전달한다. 블랙과 화이트 물감 얼룩으로 이루어진 구모경의 작품은 무엇이 배경이고 무엇이 형태인지 알 수 없게 했다. 화면의 균열이 식물의 실루엣으로 드러나는 구미경의 작품은 생성 소멸하는 자연의 이치를 표현한다. 얼음에 갇힌 꽃같은 구본아의 작품은 오랜 시간이 축적되는 노동의 액체가 고체화되는 순간을 그린다. 권희연은 3x4열로 배열한 하늘 풍경이 연상되는 화면들로 광야에서 펼쳐지는 삶을 표현한다. 실 놀이같이 엉킨 줄이 평면을 횡단하는 김귀주의 작품은 수많은 길로 이루어진 삶이 있다. 김성실은 원색으로 정사각형 화면을 조각보 같은 패턴으로 채워 넣는다. 김윤순의 추상적 풍경은 꽃무늬 삼각형으로 된 산풍경이 하늘색을 바탕으로 화사하게 빛난다. 푸른 색면이 하얀 베일에 감싸인 듯한 김은미의 꼴라주 작품은 켜켜이 쌓인 경험의 흔적들이다, 나무숲, 꽃구름 같은 이미지가 올록볼록 불규칙한 곡선 안에 있는 김은하의 작품은 지속과 순간의 관계가 있다. 볍씨가 화면 한가운데 보이는 김인자의 작품 [시간 속에서 존재와의 만남]은 시간, 존재와 같은 추상을 보여주고자 한다. 한지 꼴라주로 나무 같은 실루엣을 표현한 김춘옥은 나무 몸통에서 벗겨져 나온 듯한 형태로 무위자연을 표현한다. 김혜진은 식물적 형태를 리드미컬 하게 배치한다. 촘촘한 섬유의 망, 그리고 중간중간 검은 얼룩도 있는 김희진의 작품은 다차원적 연결망으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남빛의 작품 [바람의 소리]는 얽히고 설킨 나뭇가지가 떠오르지만 화면에 밀착되어 선적표현 추상적이다. 노신경은 바느질로 구름같기도 꽃같기도 한 비정형적 형태와 색, 그리고 그 사이를 보여준다. 류민자는 다채로운 색감의 풍경을 유기적 패턴으로 환원시켰다.박미영은 몽글몽글한 느낌으로 일상의 한때를 추상적으로 표현한다. 박선희는 티백(Tea bag)을 쌓아서 만든 추상으로 반복과 축적으로 이루어진 사유를 은유한다. 두 개의 사각형이 만나는 부분을 표현한 박용자의 작품은 화면 밖의 보이지 않은 부분에 대한 상상을 야기한다. 전통문양을 닮은 동심원 두 개가 위아래로 마주한 박효선의 작품은 원(圓)을 잠재되어 있다. 풍경이자 흑과 백의 형태/색면의 배치인 배한나의 작품은 마치 퍼즐같다. 별할매의 작품에서 하늘색, 녹색 등 풍경 관련 색조로 매일 저녁 산길의 경험이 추상화되어 있다. 밝은 바탕에 회색, 검정 형태 얹은 복부희의 모노톤 작품은 작가가 대면한 그때그때의 세상에 대한 감성적 표현이다. 손희옥의 작품에서 푸른 물주머니와 맞닿은 듯한 식물 이미지는 희망적이다. 가로줄 얼룩 위에 검은 얼룩 형태들이 박혀 있는 송수련의 작품은 현상이 아닌 본질을 직시하려는 내적 시선을 표현한다. 커다란 달의 궤적이 드러나 있는 송윤주의 작품은 달의 주기와 조응하는 생명의 질서를 추상적으로 표현한다. 송인혜는 몇 번의 시원한 붓질로 경사가 완만한 언덕 풍경같은 추상화를 그린다. 그리드 구조의 바탕의 결절점에 둥근 포인트를 준 송환아의 작품은 밝은 땅(倍達)을 추상화한다. 두 가지 색으로 땅과 숲을 표현한 신봉자는 그 위에 나뭇가지를 붙여서 추상을 구체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먹으로 다양한 굵기의 가로 세로줄 그은 신지민의 작품은 번진 형태 사이로 빛이 새어 나오는 듯하다. 안경자는 화면 가운데서 하얀 액체가 분출하는 느낌으로 역동적 삶을 표현한다. 우재연은 풀려나와 뭉쳐지는 듯한 전이의 과정을 통해는 통해 윤회(輪回)를 표현한다. 원문자의 [사유공간]은 움직이는 마음을 비롯해서 뭔가 발생하는 공간을 표현한다. 이미연은 심층에서부터 드러나는 또는 가라앉는 형태/색을 표현한다. 푸른색 패턴이 붉은색 패턴을 휘감는 듯한 이보경의 작품은 지난여름을 추억한다. 이선미는 한지로 위아래로 물결치는 결의 느낌을 촉각적으로 살린다. 이윤선은 어두운 바탕을 관통하며 전율하는 빛을 통해 고뇌하는 마음을 표현한다. 이윤정은 뽑기놀이 틀을 여러 층으로 겹쳐놓아 추억을 소환한다. 동그라미 속에 또 다른 동그라미들이 가득 채워 넣은 이영묵의 작품은 또 다른 세계에 대한 비유이다. 뾰족지붕 집과 나무 등을 기하적 패턴화한 이화자의 작품은 율동감이 두드러진다. 이효순의 [언어 지우기]는 화이트로 글자를 지운 듯한 화면으로 의미가 아니라 존재를 향한 자유를 표현한다. 장혜용의 [산으로]는 산의 능선들처럼 보이는 선과 그 안을 평탄하게 채우는 색 면으로 추상적 풍경을 그린다. 정선진의 작품은 붉은 벽돌을 배열한 듯한 사각형들로 덮인 평탄한 화면이다. 정선희는 모든 것이 생겨나고 돌아가는 흙의 이미지를 추상적으로 표현한다. 사각형 안의 사각형으로 구성한 조명식의 작품은 기하적 추상이지만 테라코타의 따스한 느낌이 있다. 영수증 다발의 이미지가 추상적 형태를 이루고 있는 진현미의 작품은 소비사회의 일상적 삶의 흔적을 표현한다. 자잘한 무늬로 덮인 두 개의 붉은 정방형 캔버스가 균형을 이루는 채성숙의 작품은 제목 그대로 마음의 상태를 표현한다. 최미연의 핫 핑크가 주요색인 밝게 빛나는 색으로 무엇인가 깨지고 다시 무엇인가 생겨나는 상태를 표현한다. 번진 잉크처럼 아래로 시원하게 죽죽 내려그은 선들이 이루는 산 풍경을 그린 최소영의 작품은 물감의 속성과 재현이 함께 녹아 있다. 화면을 거의 다 차지하는 검은 형태에 하얀 점을 가득 찍은 최윤미의 작품은 평면적이지는 않지만 구체적 형태도 없다. 표주영의 [새벽을 여는 시간]은 얼룩 조각들을 자르고 붙이며 그리는 과정을 통해 수많은 겹과 결이 시간의 흐름을 표현한다. 한상임은 정방형 화면을 가득 채운 붉은 색으로 인간을 추상화 했다. 한현주는 하늘색 하얀색 물감의 만남이 하늘 같은 무한 공간을 표현한다. 수제 한지로 만들어진 함순옥의 작품에서 바탕 면에서 일어나는 듯한 긴 면들은 화면의 평면성을 강조한다. 허은오는 [Wonder of Nature]에서 밤하늘의 오로라처럼 뻗치는 빛의 줄기같은 이미지를 보여준다. 붓펜으로 편물의 올을 화면 가득히 그린 홍성원의 [삶]은 반복되는 일상속의 미세한 변화가 기록되어 있다. 홍순주의 [결]은 몇 번 그은 굵은 선들에서 흐르듯이 내려오는 작은 선들을 통해 삶과 예술 모두에서 발견되는 결을 표현한다. 4개의 사각형에서 나온 흔적이 서로를 연결하는 황세은의 [동행]은 따로 또 같이 살아가는 삶을 표현한다. 사각 면들로 구성된 황인혜의 작품은 절제와 부드러움이 함께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