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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래된 미래와 새로운 과거- 이건수(미술비평,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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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와 새로운 과거

이건수 미술비평·전시기획

 

최근 프리즈니 키아프니 대형 아트페어가 열리면서 기록적 수치의 거래액으로 아트페어-콜렉터 시대의 막강한 파워를 과시했다. 우리 한국화는 남의 집 잔치를 담 넘어 구경하듯 부러운 시선으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해외의 수많은 미술관계자들이 찾아왔는데도 한국화를 소개할 수 있는 트랜디한 전시 하나 없었다. 현대미술시장에서 소외된 지 40여 년. 잔치는 끝났다.

한국화가 슬기로운 생존을 모색할 수 있는 방법은 간단히 두 가지이다. 현 시세에 맞추어 철저한 개혁과 변신을 꾀하는 것과 아니면 전통이 지닌 재료적 특성과 역사성을 우리시대에 더욱더 극대화시켜 발전시키는 일이다. 이 두 가지 방법 모두 동시대적 인식과 소통의 중요성을 최우선으로 인정해야 한다. 한국화만이 가질 수 있는 매체적 장점을 되살리고 증폭하여 다른 장르에서 느낄 수 없는 매력적인 광채를 간직하게 하고, 우리시대의 생각과 경험이 녹아들어 동시대의 수용자들이 개입하고 공유할 수 있는 그림으로 살아남게 해야만 한국화의 생존은 이어질 수 있다.

상상의 미술관을 구상해 보자. 선사시대를 대표하는 동굴벽화나 암각화, 고대의 미관을 드러내는 아르카익하고 고전적인 조각들, 중세의 교회건축과 스테인드 글라스, 근대의 여명을 여는 르네상스의 회화를 시작으로 더욱더 세분화하여 대략 100년 단위로 대표적 양식을 설정해본다면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등등으로 서양미술사는 전개되어 간다.

각 시대의 각 양식을 대표하는 작가와 작품을 하나씩 선정해본다면 고전주의는 다비드, 낭만주의는 들라크르와, 사실주의는 쿠르베, 인상주의는 모네 이렇게 하나가 남는다. 그 시대의 기법과 미학이 하나의 작품으로 영글어진다. (더 나아가 우주의 미술관을 상상한다면 과연 지구의 미술사를 대표하는 미술작품은 무엇이 될 것인가도 흥미로운 질문이 될 것이다.) 한 시대에 하나만 남는다. 예술의 동시대성은 그런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면 우리의 관심사인 한국미술사에 집중해본다면 한국미술의 상상미술관은 어떻게 구성될 것인가. 조선시대까지의 회화사를 통해 한 장 고르라면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한 장일까. 십수 년 전 한 미술잡지에서 한국미의 원형을 묻는 앙케트를 실시한 바 있다.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의 결정체는 무엇인가 했을 때 언제나였듯 압도적 1위는 석굴암이었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라는 석굴암 프로젝트의 실질적인 설립자이자 유력한 자산가의 이름만 나와 있다. 어느 석공이 만들었는지, 그 시대의 불상 양식은 어떤 미적 상관 관계를 갖고 있는지 확실히 모르지만 모든 예술전문가들의 눈에는 석굴암이 가장 아름다운 한국미술의 모습이었고, 한국미술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극치의 예술미를 소유하고 있는 작품이었던 것이다.

불국사와 함께 불국정토를 구현하겠다는 이상과 함께 우주의 조화와 통일을 하나의 공간으로 하나의 덩어리로 집중하여 꽃 피우겠다는 예술의지가 그 시대의 전형적인 재료인 나무와 돌, 그 시대에 가장 높은 수준의 기술을 통해 완성시킨 미의 결정체가 석굴암이었던 것이다.

그 시대의 테크놀로지가 그 시대의 종교 사상과 만나 더하거나 뺄 것 없이 군더더기 없는 빛나는 (그 시대의 기준이겠지만) 미의 정화를 만들어놓았더니 그것은 시대를 초월하여, 역사를 초월하여, 지역을 초월한 영원한 미의 모델이 된다. 우리가 지금 그려 놓는 이 그림들이 석굴암처럼 무경계의 시간과 공간으로 들어가려면 석굴암만큼만 만들면 된다. 우리 시대의 재료를 가지고 우리시대 최고의 테크놀로지로 우리시대의 철학과 감성을 형상화하면 된다. 더 좋은 재료들이 늘어나고 더 높은 기술력이 있으면서도 왜 석굴암을 능가하는 그 무엇이 나오기 어려운 것일까. 역시 재료와 기술은 해답이 아닌 것일까. 종교심 같은 신실한 마음, 미던 신이던 궁극의 대상에 대한 간절한 기도와 정성 같은 것들이 작품에 가장 중요한 요소란 말인가. 미술은 감각의 문제가 아닌 정신의 문제였단 말인가.

한국화의 위기설이 나돈 지도 수 십 년. 아직까지 한국화의 환경과 생태계가 나아졌다 회복되었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정체 아니면 연명이란 단어가 익숙하고, 사면초가의 노래소리는 점점 더 가깝게 들려오고 있다. 총체적 난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한국화에 대한 부정적 시선으로 우리의 작업을 움츠릴 수는 없다. 한국화의 생존 전략을 모색하면서도 조금씩 조금씩 본질을 인식하고 실천해야 한다. 우리시대의 철학을 우리시대의 언어로 풀어가려는 자기 쇄신이 절실한 것이다. 지필묵의 그 오래된 재료와 매체가 한국화의 유일한 특징적 요소일 수는 없다. 젊어져야하고 현재적 젊음과 소통해야한다. 나이가 젊다고 젊은 게 아니다. 정신적 새로움이 항상 자기 몸에 감돌아야 하는 것이다. 진실한 젊음은 현실에서 뛰쳐나가려는 모험을 상상하는 도전적 정신에서 나온다. 루이즈 부르주아의 말년 드로잉을 보라. 붉은색 펜과 물감으로 종이 위에 남겨진 그 선들은 늙어 주름진 손의 흔들림을 진솔하게 드러낸다. 부르주아의 자기 역사를 상징하는 붉은 색은 맑음을 향해, 종이의 깊은 곳을 향해 스며들며 투명해진다. 루이즈 부르주아는 생각이 새롭고 젊었기에 100세가 되어서도 작품 속에 젊음을 새길 수가 있었다. 영롱한 붉은 점을 남긴 제백석은 안 그랬던가.

우리의 현대미술사는 서구화라고 대신할 수 있는 근대화를 거치면서 세계미술과의 다소 뒤늦은 보조는 맞춰갔으나 그 판과 틀 위에 자생적으로 진화한 컨텐츠를 제시하는 데까지는 미흡했다고 여겨진다. 이들 대립적 요소 간의 균형적이고 보편적인 방법론을 제시하지 못한 이유는 우리 것에 대한 자신감의 부족과 급변하는 현대미술의 진도에 서둘러 적응하려 했던 조급함에 있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오리지널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의 부족, 오리지널을 어떻게 우리 시대의 소통 구조 속에 유통시킬까 하는 해석력의 부족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근현대문화사의 분단과 단절의 지속적인 과정은 더 큰 아쉬움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분단으로 인해서 근대적 통일체로서의 민족 개념이 형성되지 못한 상황, 삼대에 걸친 세대 간의 단절을 통해 계통적이고 계보적인 예술의 전승이 이루어지지 못한 현실이 우리 미술의 현재를 폐쇄적인 구조로 고착시켰다.

역사적 소외 구조 속에서 고뇌하고 있는 한국화의 재생을 위해서 인문학적 한국화를 구상해본다. 문사철(文史哲)의 얼개 속에서 설립되고 구성되는 한국화의 정체는 강인한 힘으로 자생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미술에 대한 글쓰기는 문학적 글쓰기와 함께 비평적 관점을 소유한 글쓰기로 나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비평적 글쓰기를 병행하면서 자기 작업에 대한 논리적 구조를 공고히 해야 할 것이다. 작업과정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 열린 해석을 가능케 하는 고도의 의미 숨기기 전략, 대중적 가치 평가를 내포하고 있는 전문성의 완성도를 담고 있는 작품이 문학적인 한국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미술사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작품이 어디쯤 놓여 있는 지에 대한 냉철한 인식 또한 필요하다. 동시대의 미적 기준에 매몰되지 않고 동시대의 세계관이 어떻게 자신의 작품 속에서 이야기를 던지고 있는지 반성하고 확인해야 한다. 소통의 사회성을 갖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회의하는 작업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현재 처해진 조건과 상황 속에서 최선의 몰입으로 몸부림치고 책임지려 하는 것, 그것이 윤리적인 작업이다. 득도한 도사의 도취나 여가의 몸짓 같은 제스처, 사적인 심리의 근거 없는 추상적 표현, 특히나 수묵에서 보이는 상투적인 발묵과 과감한 파묵의 피상적 효과 등은 시대의 음성과는 거리가 먼 무책임한 역사 바깥의 한국화라 할 것이다.

독서가 없는 작업은 좁은 영역의 표현 구조 속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세계를 얻으려면 책을 읽어야 하고, 영화를 보아야 하고, 여행을 떠나는 수밖에 없다. 다른 세계를 만나야 또 다른 세계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지적 여정이 단순한 작가가 무슨 철학을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런 여정을 방해하는 미적 교육의 현실이 무슨 관객을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대리석의 대리(따리, 大理)는 중국의 주름진 무늬의 돌이 대량 생산되는 지역의 이름이다. 여기서 리()는 주름과 결, 무늬를 의미하기도 한다. 물리(物理)와 심리(心理)와 지리(地理)라는 사물과 마음과 땅의 결과 무늬를 읽을 수 있어야 세상의 이치를 느낄 수 있고 그것을 작품으로 구현함으로써 우리들에게 또 다른 새로운 세계를 던져줄 수 있는 것이다.

동시대의 예술 향유와 소비에 소외되지 않는 살아있는 한국화, 함께하는 한국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동시대의 폭넓은 공감을 획득해야 한다. 우리 삶의 현장과 유리된 문화재의 박제와 보존이 한국화의 향방은 아닌 것이다. 우리 것을 넘어선 보편적인 미적 가치를 찾아내어 가장 오래된 재료로 가장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가장 새로운 기법으로 가장 오래된 오리지널리티를 표현하는 미술의 실천들을 지금부터라도 찾아내고 길러내야 한다. 동과 서가 뒤섞이고, 과거와 현재가 간섭하는 다양한 한국화의 장을 마련해줘야 한다.

한국화의 기원을 탐구하기 위해 오늘 우리의 현실적 기반과 거리가 먼 고대, 더 나아가 선사시대부터 우리 한국화의 진화를 개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부터 시작하는 역주행의 미술사를 그려보는 것이 어떨까 한다. 공시적인 현대성을 담지한 시선 속에서 지금의 우리와 연결된 과거를 재해석하고 재구성, 재탄생시키는 통찰의 기술이 필요하다. 과거를 이 시대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미래를 오래된 역사 속에서 설계해야 할 것이다.

23회를 맞는 이번 전시가 서양화와 한국화의 구분 아래 있는, 또 여성작가라는 구별의 틀에 매어져 있는 현실을 극복하고 새로운 한국화를 설계하는 시작이 되었으면 좋겠다. 장기적인 한국화 중흥의 꿈을 성실하고 한결같은 한국화여성작가회가 주축이 되어 성취해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 진정 생명을 되살리고 세상을 위로해주는 모성(母性)의 미술이 너무도 절실한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