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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국화의 전통과 변주, 그 양날의 칼- 하계훈(미술평론가, 양평군립미술관 명예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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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의 전통과 변주, 그 양날의 칼- 하계훈(미술평론가, 양평군립미술관 명예관장)

 

 

한국화여성작가회원들, 당신들은 센가요?

 

 

 

당신은 센가요? 우리는 이 질문의 대상이 남성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는다. 최근까지 여성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질문의 포인트가 빗나갔다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여성 = 아름다움’, ‘남성 = 강인함이라는 맞춤틀(frame)이 어려서부터 우리들의 삶에 씌워져 왔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왔다. 특히 산업혁명과 제1, 2차 세계대전 등의 역사적 전환점을 맞기 전까지는 더욱 그러했고, 그러므로 남성은 양() 여성은 음(), 남성은 바깥 여성은 집안이라는 도식이 사회를 작동하는 패러다임으로 오랫동안 굳게 자리 잡아 왔다.

 

우리의 근현대미술사에서도 이러한 사회적 틀에 갇혀 미술계는 남성 주도형으로 전개되어 온 것이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의 부조리를 타파하는 움직임 가운데 하나로 여성들만의 조직과 동아리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여자대학교, 여성경제인연합회, 여성기자협회, 그리고 한국화여성작가회도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 사회에 등장했고 그러한 현상에 대해서 격려의 시선과 부정적 시선이 공존해 왔다.

 

공간의 확장과 경험의 확산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당시 유럽에서 콜럼버스의 주변인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먼바다에 나가면 지구의 끝이 있고 그 너머에는 낭떠러지 아래 미지의 세계가 있다는 두려움을 당연시하며 살았다. 두려움과 무지는 공포와 환상, 그리고 왜곡에게 우리 삶의 공간을 내어준다. 그 후 수백 년이 지나서 탄생한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출현한다는 고야의 작품은, 해석이 분명하진 않지만, 대체로 그가 살던 시대의 미신과 악습에 대한 비판과 풍자가 담긴 작품으로 본다. 한국화 작가들에게 종이와 먹 너머의 세상에 캔버스와 아크릴, 유화 물감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들이 있는 공간으로 다가가도 콜럼버스의 일화에서 말한 것과 같은 낭떠러지는 없을 것이다. 물론 그 낭떠러지를 향해 모두가 배를 타고 달려갈 필요는 없다. 아니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누군가는 한국화의 전통 정신과 화법을 지킬 것이다. 그러나 콜럼버스처럼 누군가는 한 번쯤 수평선 너머의 낭떠러지 공포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쓸모와 쓰임

 

쓸모의 사전적 정의는 쓸 만한 가치’, ‘쓰이게 될 분야나 부분이다 그리고 쓰임의 사전적 정의는 쓰다의 피동사로서 돈이나 물건 따위가 실제로 사용되는 곳. 또는 그 용도. 그러므로 작가들이 창작 해내는 작품은 쓸모 있게 쓰여야 한다. 창작의 과정에서 작가는 쓸모, 즉 창작의 목적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아마추어 작가들의 여가생활을 뛰어넘는 전문적인 작가의 정신과 미의식을 바탕으로 창작된 작품이라야 미술계의 동료와 선후배들에게 그 노력과 재능, 가치를 인정받고 자신의 창작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영국의 미술평론가 알란 보우니스(Alan Bowness)는 예술가의 성장과 성공의 과정을 네 단계로 나누어 정리하였다. 첫째는 동료들의 인정, 둘째는 비평가들의 인정, 셋째는 화상과 컬렉터의 인정, 그리고 나면 대중적 갈채가 따른다고 했다. 동료들과 함께, 그러나 나 스스로도 치열하게 쓸모 있는 작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곧 예술 창작의 길인 것이다.

 

디지털 기술 복제가 가능한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예술의 원본성과 유일성

 

한국화는 우리 역사에서 오랜 전통을 지켜왔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일본을 통해 수입된 서양화 기법에 관한 관심 증대와 식민지 상황에서의 자기부정 의식, 그리고 6.25전쟁에 묻어 들어온 유럽과 미국의 새로운 미술 사조에 대한 호기심 등으로 점차 우리 미술사에서 그 설 자리가 위협을 받아왔다. 20세기에 들어서서 우리 사회의 근대화가 급속히 전개되는 동안 우리의 미술 교육제도, 생활양식, 경제 체제 등등 사회의 모든 분야가 급격하게 서구화되면서 미술 분야에서 한국화는 미술계뿐 아니라 우리 생활공간에서의 입지가 전보다 점점 좁아져 갔다.

 

이러한 한국화를 둘러싼 변화의 바람 속에 일부 작가는 전통에 도전하기도 하고 전통과 현대의 새로운 통섭을 실험하기도 하는가 하면 일부에서는 서구화 바람에 맞서서 전통적 회화의 원형을 지키려고 노력하며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서양에서 찾아볼 수 없는 우리의 전통 회화는 분명 우리의 소중한 문화자산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각 예술 분야에서 한국화(동양화)와 서양화를 구분하여 논하는 것은 다분히 재료와 형식 중심의 개념으로서 정작 작품을 창작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라고 볼 수 있는 작품의 주제나 창작의 주체 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일부에서는 한국화를 특정 장르의 개념으로 보기보다는 현재 우리들이 이곳에서 우리의 의식을 반영하는 작품이라면 모두 한국화로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한국 수묵화의 현황과 앞으로의 과제

 

수묵화(水墨畵)는 주로 한국과 중국 및 일본의 전통적인 회화를 대표하는 형식으로 알려져 있으며 유화나 수채화와 같이 회화의 재료를 명시함으로써 작품의 물리적인 성격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명칭이다. 한국과 중국 및 일본을 중심으로 수천 년간 전개되어 온 수묵화는 동양미술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다. 콜럼버스 이후 세계의 역사가 서유럽과 북미대륙을 중심으로 진행되면서 이처럼 장구한 역사를 가진 회화형식이 미술사 연구와 미술시장에서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받아왔지만, 수묵으로 창조되는 미술의 가치는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하며 향후 언제라도 그 가치가 다시 천착 되고 재평가될 수 있는 것이다.

 

수묵화가 서양의 일반적인 회화와 차이를 이루는 중요한 지점 가운데 하나는 먹과 붓이라는 단일한 재료로 작품을 제작하며, 그 과정에서 붓의 흔적이 다양하게 드러남으로써 그것이 내포하는 의미와 상징이 다른 형식의 작품들에 비하여 훨씬 깊고 중의적이며 상상력을 강하게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유화나 아크릴에 사용하는 붓에 비하여 좀 더 부드럽고 다루기가 힘든 붓으로 먹을 찍어 화선지에 필획을 그어가는 수묵화의 화법은 작가로서 붓놀림을 더 민감하게 다루어야 하는 기술이 요구되며, 화면에 형성되는 붓의 흔적과 먹의 농담에서 오는 미세한 차이와 변화에서 불러일으켜지는 상징성이 사양화의 그것이 비하여 훨씬 더 깊은 느낌을 줄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수묵화의 특징은 다른 재료와 달리 수정이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한 번에 그어진 붓의 궤적과 그로부터 드러나는 먹의 흔적이 조형적인 절대성을 갖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수묵화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재료의 물성에 대한 탐구와 함께 붓을 다루는 세밀한 손기술에 대한 오랜 훈련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수묵화는 기법적으로 세련된 차원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작품의 내용에서도 사실적인 묘사를 넘어서는 정신성과 상상력을 크게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묘사 위주의 회화가 극복하기 어려운 비가시적 가치를 다루는 작품이다. 따라서 꽃을 그리면서 자연 학습 도감처럼 정확하게 그려내는 것을 넘어서 꽃의 향과 기품을 담아야 하고, 인물을 그리더라도 골격과 근육의 닮음을 넘어서서 그 인물의 성격과 정신까지 담아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수묵의 정신은 사실상 보통의 사람들로서는 감당해 내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도 수묵화에서 이러한 불가능할 듯한 근본원리(cannon)를 오랜 시간 유지해 오는 것은 (물론 일부에서는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예술의 가치를 보존하고 그로 인해 인간 정신의 핵심적인 가치가 시대와 환경의 변화로 인해 희석되거나 허물어져 가는 것을 막아주는 효과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이 사물을 인지하고, 기억하여 상상할 수 있게 하는 작용을 상식(Common Sense)이라고 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인간은 상식을 넘어서는 고차원적인 사유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회화에 있어서 사실적인 묘사와 여기에 더해져서 일정한 상상력을 가미한 작품이 탄생하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다. 다만 이 단계를 좀 더 넘어서면 인간으로서 유일하게 생산해 낼 수 있는 고차원의 사유와 철학을 만들어 낼 수 있고, 이러한 과정이 시각적으로 구현되는 형태의 하나가 수묵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서양의 회화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본격화된 원근법의 적용과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적인 입체감을 불러일으키는 방법을 회화의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로 채택하였으며, 근대에 이르러 대상의 정확한 형태를 포착하는 사진이라는 새로운 기술이 출현하기 전까지는 이 기법이 작품의 수준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어왔다. 템페라, 유화, 아크릴 등 재료의 발달에 따라 표현의 지향점이 달라질 수 있었겠지만, 기본적으로 서양 미술에서 추구하는 바는 화면 속에서 대상을 포착하면서 우리가 느끼는 그럴듯함(verisimilitude)이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세부(detail)에 대한 묘사가 필요해지고 이러한 표현을 위한 기법을 도와주는 과학의 성과가 이를 뒷받침해 왔었다.

 

서양을 중심으로 하는 미술계는 지금까지도 현재와 일상을 작품 속에 담아내는 것을 중요한 가치로 삼고 있다. 디지털 이미지가 하루가 다르게 태어나고 변화하는 가운데, 소위 4차산업혁명 시대를 기대하면서도 서양() 미술에서 중요한 문제는 자신들의 현실과 닮은 가상성(vertuality)의 문제가 무엇보다도 관심의 맨 앞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수묵화는 은둔과 절제, 관조와 초월을 담아내고자 하는 속성을 갖는다. 그리고 이러한 속성은 자연스럽게 변화에 대한 소극적인 대응을 유발하게 되었을 것이다. 서양 미술이 기법과 기계의 발명으로 변화와 전환의 순간을 거쳐왔음에도 불구하고 수묵화의 세계는 외부 세계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은 채 커다란 변화를 추구하지 않으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의 무게는 수묵화로 내려앉는다.

 

수묵화는 서양 미술 방식으로 보면 사실주의라기보다는 추상에 가깝다. 그리고 설명적이기보다는 상징적이고 암시적이다. 산문적(prosaic)이기보다는 시적(poetic)이다. 그리고 세속적(mundane)이기보다는 초월적이고 은둔적(reclusive)이다. 물론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도식화하여 수묵화를 설명하는 방식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분석은 수묵화의 성격을 좀 더 분명히 드러내 주는 데 도움이 되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수묵화의 전통은 조선시대를 지나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거쳐오는 기간 동안 적지 않은 흔들림을 겪게 된다. 이 과정에서 1930년대 김용준이 수묵남화론을 펼치면서 일본 제국주의 통치 아래서 채색화 위주로 전개되던 우리 미술계에서 수묵이 봉건시대의 유물로 치부되는 분위기를 전환하려고 노력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1920년 동아일보에 <동양화론>을 기고한 변영로와 같이 연구자에 따라서는 조선시대 정선과 김홍도, 장승업 등으로 이어 온 전통이 일본의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왜색이 입혀지게 되고 수묵보다는 채색 위주의 화풍이 우리 화단을 지배해 온 것을 비판하기도 했다.

 

우리의 근대 역사가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로 인해 정치, 경제, 외교 등의 분야에서 주도권을 빼앗기고 식민지시기를 거쳤기 때문에 문화 분야에서도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미술 분야에서 일제 잔재 청산을 위한 하나의 대안으로서 수묵 중심의 문인화가 강조된 것은 이러한 우리 역사의 흐름을 읽어보면 일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해방 이후 1950년대까지는 이러한 맥락에서 채색화의 왜색성을 배척하는 분위기가 수묵화에 대한 상대적인 우호적 평가로 이어진 측면이 있다.

 

송희경에 의하면 우리 현대미술에서 1960년대는 이러한 수묵화의 회복 경향을 따르면서 민족의식 고양을 위해 진경산수화나 풍속화와 같은 전통 장르가 재조명받게 되었으며 1960년대부터 소위 사경산수화(寫景山水畵)가 확산하였다. 사경산수화는 우리 전통 산수에 서양식 화법이 가미된 화풍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경향은 1950년 발생한 6.25 전쟁을 계기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양의 문화가 직, 간접적으로 수입되어 우리 전통문화와의 융합이 일어난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미술의 전통으로 조선시대부터 이어온 수묵화는 일본 제국주의라는 타자와 서양 신문화라는 또 다른 타자와의 조우를 통해 새로운 요소들과의 융합이 이루어지면서 현대적인 수묵의 길을 모색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수묵화의 역사를 살펴보면 현대의 수묵화는 부분적으로 변화를 수용하면서도 외부로부터 주입되거나 스며드는 영향력을 극복해 가며 우리 고유의 정신과 기법을 지켜오려고 노력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전개되는 상황은 이와는 조금 달랐다. 1970년대와 1980년대를 지나오면서 수묵화의 전통은 그 깊이와 두께를 잃어버려 왔다. 그 이유는 다양한 곳에서 찾을 수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우리나라의 사회 성장 방향이 서구화 일변도로 치우치면서 전통과 과거는 계승하기보다는 극복하고 버려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미술 분야에서도 1970년대에 잠시 도자기와 함께 서화 작품들이 미술품 시장에서 골동품 거래에 관한 관심의 대상이 된 적은 있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미술적 관심보다는 압축 성장하는 우리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존재감을 표현하는 장식품 같은 성격으로 미술시장을 스쳐 갔을 뿐이었다.

 

1998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근대를 보는 눈(한국근대미술: 수묵, 채색화)>전의 도록에서 큐레이터 김희대는 우리 수묵화와 채색화의 연구가 짧고 전문 인력이 부족하며, 그러므로 진위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는 분위기에서 전시회를 개최하는 기획자로서의 어려움을 밝힌 적이 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이때쯤에는 이미 미술시장에서도 1970년대의 우리 전통미술에 대한 투기적인 관심이 사라지고 서구식 미학을 담아내는 작품에 관심이 옮겨가고 있었던 때라서 이러한 전시의 기획이 대중적인 관심을 반영하는가에 대한 고민도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 당시의 우리 수묵화에 대한 염려의 시각은 2001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수묵의 향기, 수묵의 조형 ­ ··일 현대수묵화전>의 도록에 원로 작가 이종상이 기고한 글에서도 나타난다. 이종상은 그의 글에서 남북의 단절, 동서양 화단의 단절, 추상과 구상의 단절 등 한국미술의 새로운 정체성을 찾는 마당에서 중층적으로 일어난 단절의 현상을 겪어 오면서 수묵이 갖게 되는 어려움을 지적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우리 전통 회화를 담당할 작가들은 주로 서울대학교와 홍익대학교 등의 미술대학을 통해서 배출된 작가들이었으며 그들에 의해 다시 후학들이 양성되고 있었다. 이 시기의 미술대학 동양화과 교수들의 작품 경향과 그들이 활동하고 주장하였던 내용들을 살펴보면 당시 우리 수묵화의 상황이 간접적으로 가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의 미술대학 상황은 수묵화에 대해 우호적인 것은 아니었다. 소위 서양화와 동양화로 구분되는 미술대학 진학 현상에 있어서 학생의 숫자나 졸업 이후 활동하는 작가의 비중, 미술시장의 관심 등에 있어서 우리 화단은 서양화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1988년 하계올림픽 개최를 기점으로 정부에서 해외여행 자유화를 시행하면서 비슷한 시기에 국외 유학에 관한 규정을 완화하여, 미술 분야에 있어서 외국 유학 학생들의 지원 국가가 대부분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점도 미술 분야에 있어서 서양 중심화 현상이 점점 더 가중됐던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 무렵 정부는 세계화의 구호 아래 사실상 서양화(westernization)를 유도한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1990년 무렵부터 동서 냉전체제가 붕괴하는 과정에서 미술 분야에서 나타난 현상 가운데 하나인 각종 국제 비엔날레 형식의 행사에서도 대부분은 수묵화가 지향하는 정신과 형식과는 거리가 있는 작품들을 다루어 왔음을 볼 때, 우리나라뿐 아니라 동양의 수묵화가 국내외에서 활성화되기에는 국제적인 미술환경이 우호적이지 않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수묵화 활성화를 위한 구체적 행동에 돌입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어쩌면 태생적으로 안고 가야 하는 의무일 수도 있다. 우리에게 서양화가로 알려진 오지호의 경우에도 1946<신문학>에 기고한 글에서 동양화가 오랜 역사를 두고 조선 본래의 예술이었고 또 앞으로도 조선의 예술이어야 할 것이라고 하면서도 새로운 역사의 흐름에 등을 지는 것은 자멸을 결과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처럼 오늘날의 수묵화는 전통의 근간을 유지하되 시대의 흐름에 등을 돌리지 않아야 하는 두 가지 과제를 조화롭게 잘 수행하는 것이 주된 임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명을 실현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우선 단기적 성과보다는 중장기적 목표를 세우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긴 호흡의 실천을 권장하고 싶다. 현재의 수묵화를 동시대의 작가들과 관람자들에게 소개하고 공유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앞으로 우리 사회를 이끌어갈 어린 세대들에게 수묵화의 진정한 의미와 기치를 잘 전해주고, 그로부터 그들이 능동적으로 수묵화에 접근하고 그것을 생활 속에서 거부감 없이 즐기면서 은연중에 자신들의 문화로 체질화하고 점차 그 가치의 중심으로 진입하게 해주는 체계적인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계획이 예정대로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다음 세대에서 수묵화를 아끼는 좋은 작가들과 그것을 연구하는 학자들과 기획자들을 풍부하게 보유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