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반복하지 않는 자들: 한국화 여성작가들의 조형 실천과 한국화의 갱신/배 원 정 (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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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하지 않는 자들: 한국화 여성작가들의 조형 실천과 한국화의 갱신
배 원 정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동양화전공 겸임교수
Ⅰ. ‘인품즉화품’의 전개와 근대적 변용
한국화는 근대화되었는가. 이 질문을 형식과 기법의 변화로 답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수묵과 채색의 영역이 확장되었고, 화면 구성과 재료의 방식도 달라졌다. 그러나 작품 분석의 가장 기본적인 기준이 내용과 형식, 즉 창작의식과 조형의식을 함께 살펴보는 것에 있다면 형식적 변화만으로 한국화의 근대화를 논하는 것은 충분치 않다. 근대화를 둘러싼 논의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반복적으로 제기되어온 물음이 있다. 예술가는 외부의 규범이나 전통에 종속된 존재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의 내적 필연성에 따라 세계를 구축하는 자율적 주체인가. 근대 미학의 중요한 한 흐름은 예술을 외부의 권위나 목적에 종속된 것으로 보기보다, 작가의 고유한 사유와 내면적 필연성이 작품 속에 구현되는 것으로 이해해왔다. 이 관점에서 근대적 예술가상의 핵심은 단순한 기술적 숙련이 아니라, 작가의 고유한 사유와 삶의 태도가 작품의 형식과 내용 속에 일관되게 관철되는 데 있다. 뷔퐁이 “문체가 곧 그 사람”이라고 말하고, 에드워드 영이 독창적 작가를 내면의 정신에서 자라나는 존재로 본 것은, 근대 이후 예술가의 개별성과 내면적 필연성을 중시하는 흐름을 보여준다. 삶과 예술의 일치는 근대적 작가 주체를 이해하는 하나의 중요한 표상이 되었다. 동아시아 미학에도 이와 구조적으로 유사한 명제들이 있다. ‘서여기인(書如其人)’, “글씨가 그 사람이다”란 명제, 그리고 ‘인품즉화품(人品卽畵品)’, “사람됨이 곧 그림의 품격”이라는 이 명제는 삶과 예술이 분리될 수 없다는 믿음을 그 안에 품고 있었다. 그러나 전통 시대의 ‘인품즉화품’과 근대적 작가론이 요청한 ‘삶과 예술의 일치’ 사이에는 미묘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전통적 화론에서 작가의 개성과 내면은 도덕적 수양과 인격의 완성을 통해 구현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반면 근대적 작가론은 작가 개인의 고유한 사유와 삶의 태도 자체를 작품의 핵심 근거로 삼는다. ‘수양된 인격’에서 ‘삶의 태도’로의 이러한 무게중심 이동은 전통과 근대를 구분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며, ‘인품즉화품’이라는 명제가 한국화의 근대적 변용을 읽어내는 준거가 된다. 이 글은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인품즉화품’이라는 명제를 하나의 해석 틀로 삼아, 근대 이후 한국화 담론이 이 명제를 어떻게 호명하고, 어떻게 변용시켰는가를 묻는다. 그리고 그 물음은 이 글의 제목이 가리키는 것처럼 한국화 여성 작가들의 조형 실천을 새롭게 조명하는 근거가 되며, 동시에 한국화의 위기를 진단하고 그 갱신의 방향을 모색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인품즉화품’의 철학적 토대를 가장 명확하게 제시한 것은 북송 시대의 화론가 곽약허(郭若虛)였다. 그는 《도화견문지(圖畵見聞誌)》의 〈논기운비사(論氣韻非師)〉 편에서 “그 사람의 인품이 이미 높다면, 기운이 고아하지 않을 수 없다. 기운이 이미 고아하다면, 생동감이 없을 수 없다(人品旣高, 氣韻不得不高. 氣韻旣高, 生動不得不至)”고 하였다. 이 논리는 이후 청나라 심종건(沈宗騫)의 《개주학화편(芥舟學畫編)》에 이르러 “인격이 높으면 화격도 높다(人品高, 畫格亦高)”는 명제로 압축되면서 동아시아 화론을 관통하는 미학적 준거로 자리 잡았다. 흥미로운 것은 이 명제들이 조선에 수용되는 맥락이 중국과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조선은 육법 가운데 ‘기운생동(氣韻生動)’을 중심으로 이를 수용하면서 유교적 수양과 연결하는 방향으로 전개하였다. 조선 성리학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구조 안에서 ‘인품즉화품’을 받아들였다. 개인의 수양이 사회적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 앎과 삶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지행일치(知行一致)’의 요청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성립은 시사적이다. 최근 연구들은 ‘즉물궁리(即物窮理)’와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성리학적 자연관이 실경을 직접 보며 진면목을 그려내는 진경산수화의 정신과 맞닿아 있음을 강조한다. 이처럼 조선에서 ‘인품즉화품’은 성리학적 수양과 결합되면서 보다 강한 윤리적 의미를 띠게 되었다. 조선의 선비들은 자신들이 그린 그림에 중국식 용어인 '문인화(文人畵)'를 직접 적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았다. 조선 후기의 공사(公私) 기록들에서 ‘선비화가’와 ‘선비그림’을 지칭하는 통용 용어는 ‘유화(儒畵)’였다. ‘문인화’라는 용어가 조선 선비그림에 적용되기 시작한 것은 1940-50년대 이후 근대기로부터였으며, 이는 중국 문인화와 일본 남화(南畵)의 개념을 충분한 재검토 없이 조선시대 회화에 적용하면서 서서히 정착된 것으로 해석된다. ‘유(儒)’는 유학자, 즉 ‘수기치인’을 실천하는 주체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유화란 삶과 예술이 분리되지 않는 실천의 산물이라는 의미망 속에서 이해될 수 있는 용어였다. 그렇다면 근대 한국화단은 이 명제를 어떻게 계승했는가. 동연사(東硏社)와 육대가(六大家)를 중심으로 구성된 근대 한국화의 공식 서사는 수묵 중심주의, 문인화 프레임, 그리고 작가의 인격과 작품의 가치를 연결하는 정신성 담론을 주요한 기둥으로 삼아 권위를 형성했다. 이 담론은 ‘인품즉화품’의 언어를 반복적으로 호명했다. 그러나 담론의 언어와 제도적 실천 사이에는 일정한 간극이 존재했다. 해방 이후 수묵이 민족미술의 정통으로 재천명되고 채색화가 왜색의 잔재로 비판받는 구도는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그 담론이 채색화를 실천해 온 여성 작가들에게 어떻게 작용했는가, 이것이 이 글의 핵심 질문이다. ‘인품즉화품’이라는 명제와 실제 화단 권력의 작동 방식 사이의 긴장, 그리고 그 긴장 속에서 여성 작가들이 만들어낸 실천을 이제부터 추적하고자 한다.
Ⅱ. 여성 작가들은 어디 있었는가
한국화 담론에서 여성 작가들이 차지한 자리를 묻는 것은 단순히 누락된 이름을 발굴하고 복원하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담론의 위계 자체, 무엇이 중심으로 호명되고 무엇이 주변으로 배치되는가의 논리를 검토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위계는 근대에 갑자기 형성된 것이 아니다. 조선 시대부터 이미 뿌리내리고 있었다. 16세기의 기록들은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을 산수화가로 명확하게 위치시킨다. 소세양(蘇世讓)은 『양곡집(陽谷集)』에서, 정사릉(鄭士龍)은 『호음잡고(湖陰雜稿)』에서 신사임당의 산수화를 평하였다. 어숙권(魚叔權)은 『패관잡기(稗官雜記)』에서 조선 전기 양반 사대부 출신의 산수화가 세 명을 꼽으면서 신사임당을 그 가운데 한 명으로 들었다. 특히 어숙권이 덧붙인 “어찌 부인의 필치라고 소홀히 할 것이며, 또 어찌 부인의 할 일이 아니라고 책망할 것인가”라는 반문은 당시 여성의 산수화 실천이 사회적 저항에 직면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17세기에 이르러 상황은 달라진다. 신사임당의 산수화는 성리학자들의 시선 아래 재평가되면서, 그들의 논리에 부합하는 초충(草蟲) 이미지가 부상하였다. 18세기 노론계 학자들에 의해 신사임당은 초충도의 대가로 재소환되었다. 주목할 것은, 현전하는 신사임당의 확실한 진작(眞作)으로서 초충도는 확인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현전 작품과 후대의 표상 사이에 생겨난 이 간극은, 여성 예술가에 대한 역사적 기억이 어떻게 재편집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여성과 산수화 장르의 분리는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후대 담론 속에서 재편집된 역사적 과정이었다. 산수화는 동아시아 회화사에서 장르 품계의 정점에 있는 화목이다. ‘인품즉화품’의 명제가 가장 직접적으로 구현되는 장르이기도 하다. 조선 성리학적 맥락에서 산수화를 그린다는 것은 ‘즉물궁리’와 ‘낙산악수(樂山樂水)’의 실천, 곧 삶과 예술이 일치하는 유화(儒畵) 정신의 가장 직접적인 발현이었다. 그 장르에서 여성이 배제된 것은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었다. 산수화라는 장르 권력을 통해 '인품즉화품'의 주체 바깥으로 여성이 위치 지어지는 필연적 과정이었던 것이다. 이 구조는 근대로 이어진다. 1922년 창설된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조선미전)는 한국 근대 여성화단의 사실상 유일한 제도적 진입로였다. 민족과 젠더의 구분 없이 참여 가능한 공모전으로 설계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성화가들의 활동 공간이 되었다. 1923년 이후 여성 작가들의 출품이 본격화되었으며, 특히 동양화부에서 서양화부에 비해 여성화가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여성 미술교육이 동양화 중심의 도제식 수업 위주로 이루어졌다는 점, 누드와 야외 사생을 주요 방법론으로 삼는 서양화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여성의 서양화 진출을 억제했다는 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그러나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이 인정받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여성 출품자들은 남성 심사위원들의 시선 안에서 심사받아야 했으며, 그 시선이 선호하는 여성상을 재현함으로써 화단 진입의 발판을 마련해야 했다. 남성 작가들이 작품으로 평가되었다면, 여성 작가들은 대체로 인격과 품행과 관계의 언어로 소개되었다. 당대 언론은 여성화가의 작품 앞에서 “여자도 이와 같이 쓰느냐”, “어린 누이들의 부드러운 손으로 정성을 다하여 쓴 글씨”, “연약한 여자의 손으로 능란한 수완을 발휘”했다는 식의 서술을 반복했다. ‘○○의 제자’, ‘규수화가’, ‘여류화가’, 이 호명들은 작가를 작품 앞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작가를 그가 속한 사회적 관계와 성별의 자리에 위치시키는 장치였다. 이 구조를 가장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정찬영(鄭燦英, 1906-1988)이다. 정찬영은 1931년 제10회 조선미전 동양화부에서 채색화조화 〈여광(麗光)〉으로 여성 최초의 특선을 수상했다. 이후 수차례 특선과 창덕궁상을 이어가며 화단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당시 언론들의 평가는 작품보다 인물에 집중되었다. 화풍의 특징, 붓질의 성격, 전통과의 관계 같은 조형적 언어가 아니라 온화한 성품, 단아한 품행, 사제 관계가 작품론보다 앞세워졌다. ‘규수화가’라는 수식어는 이 시선을 압축한다. 이 호명은 표면상 찬사처럼 보이지만, 작가를 작품 앞에 세우는 대신 ‘여성’의 자리에 가두는 것이었다.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은, ‘인품즉화품’의 논리라면 작가의 인물됨을 살피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 인물론이 수양과 예술적 인격을 향한 것이 아니라, 외모·품행·사제관계라는 젠더화된 기준으로 이루어졌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 기준이 남성 작가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결국 1939년 생후 8개월 된 둘째 아들을 병으로 잃으면서 정찬영은 절필을 결심하였다. 이 개인적 비극이 결정적인 단절로 이어진 데에는, 창작을 지속할 제도적·사회적 조건이 충분히 갖추어지지 않았던 당대 여성 작가의 현실이 함께 놓여 있었다. 천경자(千鏡子, 1924-2015)와 박래현(朴崍賢, 1920-1976)은 이 경로 위에서 출발했지만, 그 경로를 다르게 걸어간 작가들이다. 두 사람 모두 일본 유학을 통해 동양화를 익히고 선전을 통해 화단에 이름을 알렸다. 박래현의 초기작 〈단장(丹粧)〉(1943)이 조선미전 총독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기량의 증거인 동시에, 당시 심사 기준이 요구하는 여성상을 정확히 구현했다는 사실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이 기존 질서와 관계 맺는 방식은 점차 달라진다. 해방 이후 한국화단의 지형은 새로운 배제의 구조를 만들어냈다. ‘왜색탈피’와 ‘민족미술 건설’의 기치 아래 수묵이 조선 문인화의 정통으로 재천명되고, 채색화는 일본색의 잔재로 비판받았다. 여성 작가들이 상대적으로 채색화 영역에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 담론은 여성 작가들의 조형적 실천에 직접적인 압박으로 작용했다. 채색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컬러 TV의 등장 이후였다. 1980년대 초까지 10여 명에 불과하던 여성 채색화가의 수는 중엽을 지나면서 1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급증했다. 이 변화는 역으로, 채색이 억제되었던 시기 동안 여성 작가들의 채색 실천이 감내해야 했던 구조적 압박의 무게를 보여준다. 이 시기 산수화 장르의 상황은 배제의 논리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1970-80년대 남성 산수화가들이 이른바 '국민산수'로 칭송받으며 화단의 중심을 장악하던 시기에, 여성 산수화가는 사실상 이인실(李仁實, 1934-) 한 명 정도에 불과했다. 오용길(吳龍吉, 1946-) 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는 "여성 산수화가는 이인실 외에 거의 없었고, 대부분 추상화나 인물·화조 계열로 나아가는 경향이 강했다"고 증언한다. 신사임당의 산수화가 후대의 표상 속에서 주변화된 것부터 20세기 후반 여성 산수화가의 사실상의 부재까지, 이 긴 경로는 우연의 반복이 아니라 모순된 지속이었던 것이다. ‘인품즉화품’의 명제가 가장 직접적으로 구현되어야 할 장르에서 여성은 지속적으로 주변화되어 왔다. 그러나 이 주변화가 여성 작가들의 창작 실천을 규제하지는 못했다. 산수화 장르에서 밀려난 자리에서, ‘채색의 재발견’, ‘매체의 실험’, ‘도시 현실의 포착’이라는 전혀 다른 방향의 다양한 실천이 이루어졌다. 그것이 다음 장의 주제다.
Ⅲ. 무엇을 반복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산수화 장르에서 밀려난 자리에서 무엇이 생겨났는가. 그리고 무엇이 반복되지 않았는가. 이 물음은 단순한 보상의 서사로 답할 수 없다. 이 장에서는 여성 작가들의 실천이 나타난 방향을 네 가지 국면으로 나누어 살핀다. 첫째, 자전적 세계를 화면의 형식 원리로 삼은 실천이다. 둘째, 재료의 탐구와 기법의 독자적 전개를 통해 한국화의 외연을 확장한 실천이다. 셋째, 장르 경계 자체를 전제로 삼지 않는 방식의 실험이다. 넷째, 여성 화가들의 제도적 거점을 마련한 실천이다. 이 네 국면은 서로 겹치고 이어지며 한국화의 갱신이라는 새로운 지형을 형성했다. 채색화가 왜색으로 비판받고, 구상이 비구상과의 대립 속에서 주변화되며, 여성의 이름이 작품보다 인물로 소비되던 조건 속에서 여성 작가들은 창작의 근거를 스스로 발굴해야 했다. 전통적 ‘인품즉화품’이 도덕적 수양을 그림의 전제로 삼았다면, 여성 작가들의 화업은 삶 자체를 창작의 근거로 삼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 점에서 이들의 작업은 ‘인품즉화품’의 근대적 변용으로 읽힐 수 있다.
1. 자전적 세계의 구축 — 인격 수양 중심 화론의 이탈
천경자(千鏡子, 1924-2015)는 자신의 삶을 그림의 직접적인 근거로 삼았다. 이룰 수 없는 사랑, 혈육의 죽음, 결혼제도의 굴레, 여성으로서의 고독, 이 모든 것이 화면 안으로 들어왔다. 1951년의 〈생태(生態)〉는 35마리의 뱀을 화면 가득 묘사한 작품으로, 유교적 서화관이 상상하기 어려운 이 모티프는 조형의 토대를 삶의 고통 속에서 직접 끌어오겠다는 태도의 표명이었다. 이는 ‘인품즉화품’의 실천 방식으로 상정된 관조와 수양을 통해 완성된 인격을 작품에 구현하는 경로와는 정면으로 달랐다. 해방 이후 수묵 중심의 담론이 채색화를 왜색으로 밀어내던 시기에도 천경자는 채색을 고수했다. 그것은 자신의 조형 언어와 삶의 태도를 일치시키는 방식이었다. 당대 비평 담론이 여성 화가를 ‘인품즉화품’의 주체에서 배제하고 젠더화된 기준으로 평가하던 조건에서, 외부가 규정한 ‘규수화가’의 자리를 거부하고 내적 확신에서 창작의 근거를 찾겠다는 선택은 조형적 결단인 동시에 주체적 자기 정의였다. 1969년의 첫 세계여행 이후에는 꽃·뱀·장갑·트럼프 등 자전적 도상들이 정교하게 배치된 알레고리적 내러티브로 그 언어를 심화해갔다. 삶이 바뀔 때마다 화면의 언어도 바뀌었다. 1954년 홍익대학교 교수로 임용된 천경자는 수묵 중심 학풍 안에서 채색화 수업을 맡았다. 이 임용은 개인적 성취이기도 했지만, 채색화가 제도 교육 안에 발판을 갖게 되는 구조적 사건이기도 했다. 박래현(朴崍賢, 1920-1976)은 다른 방향에서 같은 긴장을 살아냈다. 그의 이름은 오랫동안 ‘김기창의 부인’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소비되었다. 그 조건 속에서 박래현은 1960년대 후반부터 털실·노끈·엽전으로 태피스트리를, 동판화·석판화·메조틴트로 판화를, 전통 안료로 도자기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재료와 기법의 탐구가 예술적 인식의 심화와 분리될 수 없다는 이 인식은, 동양화란 무엇인가를 재료의 차원에서부터 다시 묻는 태도였다. 박래현은 홀로 미국으로 건너가 에칭·애쿼틴트·콜라그래피·포토에칭 등 당시 국내에서는 거의 시도되지 않던 기법들을 익혔다. 대표작 〈기원(The Origin)〉(1972)은 여러 판을 조립하여 하나의 화면을 구성한 작품으로, 하와이 국제판화전에 출품되어 영구 소장되었다. 동양화의 경계를 스스로 해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던 그의 실험이 어디까지 이어졌을지는, 1976년의 이른 죽음으로 인해 한국화단이 끝내 확인하지 못한 채 남겨진 가능성으로 남았다.
2. 재료 탐구와 기법의 독자적 전개 — 수묵 중심주의의 이탈
이숙자(李淑子, 1942-)는 채색화가 왜색으로 비판받던 시절, 채색화의 역사적 정통성을 이론적으로 구축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973년 첫 개인전에 “이숙자 한국화전”이라는 타이틀을 내건 것, 석사논문에서 ‘한국화 정립’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것이 그 단적인 사례다. 기존 한국화 담론이 채색화를 왜색의 잔재로 위치시킨 반면, 이숙자는 채색화의 역사적 정통성을 이론과 실천의 두 차원에서 동시에 논증했다. 정신성 담론으로 정당성을 증명해온 기존 수묵 중심 담론에 채색화의 언어로 정면 대응한 것이었다. 이 탐구는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보리밭 연작에서 본격적으로 구현되었다. 이숙자는 매년 초여름 보리밭을 찾아 스케치를 반복했고, 보리 낱알 하나하나를 분채(粉彩)로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화면의 밀도를 구축했다. 여성 화가들이 당대 담론 안에서 비평의 대상이었지, 비평의 주체로 인정받지 못했던 조건에서 이숙자가 이론가의 위치를 함께 자임했다는 사실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70대가 넘은 나이에도 보리의 입체감을 더욱 두텁게 밀어붙이는 방식으로 작업을 이어가는 성실함은 재료와 삶의 태도가 분리되지 않는 실천의 증거다. 이화자(李和子, 1943-)는 조형의 원리를 한국 채색화의 역사적 뿌리 속에서 직접 발굴하는 방식으로 탐구를 전개했다. “채색화는 곧 일본화라고 생각하는 왜곡된 인식이 너무나 답답한 현실”이었다고 했던 그는 전국의 사찰을 답사하고, 고분벽화와 불교회화의 기법을 탐구하며, 돈황과 아잔타 석굴까지 찾아갔다. 사승(師承)의 계보를 따르는 대신 역사와의 직접적 대면을 조형 언어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었다. 이 탐구가 가장 독창적으로 구현된 것이 ‘박락(剝落)’과 ‘균열(龜裂)’의 미학이다. 이화자는 문화재 보존수복 분야의 손상 개념을 조형적 요소로 의도적으로 끌어들였다. 오래됨이 손상이 아니라 시간의 축적으로 읽히는 이 방식은, 서구 엥포르멜이나 하이퍼리얼리즘과 구별되는 한국 채색화의 역사적 맥락에서 발견한 이화자 고유의 조형 언어였다. 심경자(沈璟子, 1943-)는 1970년대 초부터 한지를 찢어 콜라주하거나 수성 재료를 활용하는 방식으로 한지의 물성 자체를 탐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가르마 시리즈’로 대표되는 그의 작업은 서양 초현실주의의 프로타주 기법과 전통 탁본의 방식을 결합하여, 시간을 거쳐 흔적이 축적된 사물들의 질감을 종이에 담아낸다. 재료를 표현의 수단이 아니라 탐구의 대상으로 전환한 이 방식은, 기존 한국화의 재료 사용 방식과는 다른 방향의 탐구였다. 이 세 작가의 실천은 각기 다른 방향에서 공통의 결론에 도달한다. 형식의 근거를 수묵의 정통성이나 사승의 계보 같은 외부의 권위가 아니라, 재료와의 직접적 대면과 역사에 대한 독자적 탐구에서 찾았다는 점이다.
3. 동시대 현실의 도입 — 관조적 산수 전통의 이탈
1977년과 1978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동양화를 공부하던 강남미(康南美, 1951-)·김아영(金雅暎, 1953-)·최윤정 세 사람이 〈삼인행(三人行)〉이라는 이름의 전시를 열었다. 이 전시가 당시 화단에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출품작의 내용이 기존 동양화의 문법과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김아영의 〈옥인동〉은 경복궁 왼편 인왕산 자락 아래 오래된 한옥과 허름한 가옥이 혼재하던 풍경을 먹과 맑은 채색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산수화가 ‘즉물궁리’와 ‘낙산악수’의 정신적 실천으로 위계화되어 있었다면, 이들은 자연이 아닌 도시 현실, 지금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공간을 동양화의 재료와 필묵으로 담아냄으로써, 형식의 근거를 ‘관조적 자연’이 아니라 ‘동시대 삶의 현실’에서 찾는 전환을 수행했다. 전통의 경직된 가치와 고답적 형식주의가 여전히 화단을 지배하던 시기에, 이 전시는 한국화의 주제와 시선이 확장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실제 화면으로 보여준 사례로 남는다.
4. 제도적 거점의 창설 — 사승 중심 구조의 이탈
김춘옥(金春玉, 1946-)은 한국화의 재료적 가능성을 밀어붙이는 동시에, 여성 화가들이 지속적으로 작업할 수 있는 제도적 조건을 직접 만든 작가다. 그의 작업은 한국화 화면에 그림을 그려나가는 대신, 한지를 여러 겹 붙인 후 하나씩 뜯어내는 방식으로 화면의 층을 형성하고 입체와 질감을 살려내는 데서 출발한다. 더하는 것이 아니라 빼는 방식으로 깊이를 얻는 이 역설적 방법은, 기존 한국화의 재료 사용 방식, 즉 필묵과 획을 어떻게 ‘더하는지’가 주된 논리였던 것을 뒤집은 것이었다. 1999년 11월 27일, 김춘옥은 한국화여성작가회를 창립했다. 창립선언문은 “과거에는 약자의 개념이었던 여성, 한국화”라고 명시한다. 이 표현은 채색화와 여성이 동일한 구조적 위치에 놓여 있었음을 당사자들이 직접 인식하고 언어화한 것이다. Ⅱ장에서 학술적으로 논증한 배제의 역사, 즉 채색화의 왜색 비판, 여성의 주변화, 사승 계보 의존 구조를 당사자들이 스스로 자각하고 집합적으로 언어화했다는 점에서, 이 텍스트는 구조적 배제에 대한 집합적 자각의 기록이다. 발표의 자리, 비평의 언어, 제도적 가시성이 주어지지 않는 조건에서 스스로 그것을 만들어낸 이 창립은, ‘인품즉화품’이 요청한 삶과 예술의 일치가 개인 작가의 화면 안에서만 구현된 것이 아니라 화단의 제도적 지형을 바꾸는 방식으로 확장된 사례로 읽힌다.
Ⅳ. 갱신의 역사와 그 현재
갱신은 이루어졌다. 그러나 평가는 지체되었다. 이 지체가 단순한 시간의 문제가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글은 ‘인품즉화품’이라는 명제를 해석의 틀로 삼아 이 문제에 접근했다. 담론의 언어로는 반복되었으나, 화단 권력이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을 바꾸지는 못했던 것, 이것은 개인의 위선이 아니라, 하나의 명제가 실천을 이끄는 원리가 아니라 정통성을 내세우는 언어로 굳어질 때 생겨나는 필연적인 결과였다. ‘인품즉화품’은 미학적 명제인 동시에 윤리적 명제다. 그렇다면 그 진정한 의미는 이 명제를 가장 크게 선언한 자가 아니라, 그것을 삶으로 실천한 자들의 화업을 통해 비로소 확인된다. 이 글이 주목하는 것은 그 선언 없이 그것을 살아낸 자들이다. 천경자는 삶의 고통을 화면의 논리로 전환했고, 박래현은 억압된 조형 의지를 매체 실험으로 확장시켰다. 이숙자는 이론과 실천을 동시에 수행하며 채색화의 역사적 정당성을 스스로 구축했고, 이화자는 훼손된 것들 속에서 새로운 미적 언어를 발견했다. 심경자는 재료의 물성과 직관적 탐구에서 새로운 조형 가능성을 열었고, 김춘옥은 조형 실험과 제도 창설을 동시에 수행하며 화단의 지형을 넓혔다. 삼인행은 동양화의 시선을 동시대 현실의 풍경 쪽으로 열었다. 이들은 선언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천했다. 미술사 서술의 젠더 불균형과 ‘여류화가’라는 범주가 작동시킨 주변화의 논리가 이 지체를 구조적으로 만들어왔다. 갱신의 역사적 의미를 지금 기술하는 것은, 단순한 복원이 아니라 한국화의 역사를 더 정확하게 쓰는 일이다. 그리고 그 갱신이 앞으로도 가능하려면, 붓을 드는 자의 삶이 그 붓끝과 일치해야 한다는 요청 역시 닫히지 않았다. |